주한 스위스 대사관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실용과 예술의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었다.
스위스 출신 예술가 레나 마리아 튀링의 워터 커넥션. 돌은 스위스에서 가져온 것으로 마당에 난 물길은 한강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한양도성 서쪽에는 돈의문이 있었다. 서대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철거됐지만, 그곳에 뿌리내린 삶의 터전만큼은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자리한다. 새문안라 불리던 그 동네는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재개발이 시작 됐다. 대형 아파트 단지가 하나둘 들어섰고, 옛 흔적은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는 시설을 찾아야만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 1974년부터 이곳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던 주한 스위스 대사관은 마을이 조금씩 삭막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몸소 경험했다. 고층화와 과밀화는 재개발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필요 충분 조건이었다. 2012년 국제현상응모를 진행한 주한 스위스 대사관은 전 세계에서 제출한 70여 개의 설계안 중 스위스 건축사 버크하르트+파트너 Burckhardt+Partner와 손을 잡았다. 도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국의 전통 가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컨셉트. 건축을 통한 가장 이상적인 외교가 아닐까. 국내에서는 생소한 철근 콘트리트와 집성목의 합성 구조, 친환경 시설의 도입 등으로 인해 설계부터 준공까지 무려 6년의 시간이 걸렸다. 2019년, 그렇게 국내 최초의 한옥 대사관이 문을 열었다.
귀빈을 맞이하는 응접실로 사용하는 공간. 정면에 걸린 작품은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의 부조.
아틀리에 오이의 혼미노시 가든 모빌과 포이 암체어가 놓인 2층 공간.
천장에 노출된 목재는 한옥의 대들보를 연상시킨다.
대사관은 주변 풍경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장인이 만든 듯한 저층의 편자 모양 건물은 병풍처럼 에워싼 고층 아파트 숲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변과 고립되는 것을 경계하며 건물 주위로 소나무와 은행나무를 둘러 심었다. 덕분에 길 건너 자리한 경희궁 공원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콘크리트 담장을 지나면 중정을 품은 ㄷ자 모양의 목 구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위스 전통 가옥 샬레와 한옥이 동시에 연상되는 따뜻한 느낌.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뤄진 건물에는 대사의 관저와 사무 공간, 회의실, 카페테리아, 다목적실 등이 자리한다. 관저 옆에는 귀빈 방문 시 사용하는 응접실과 회의실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다. 대사관에 있는 가구의 컨설팅은 스위스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가 맡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실 천장에 걸린 퓨전 Fusion 조명, 종이를 접어 만든 혼미노시 가든 Honminoshi Garden, 포이 Poi 암체어 등 아틀리에 오이의 작품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이유다.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카페테리아. 오른쪽 벽면에 책장을 배치해 작은 도서관 역할도 함께한다.
스위스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 제로를 달성하는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한다. 이는 스위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위치한 정부 건물과 시설에도 적용된다. 대사관에도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친환경 기술과 지속가능성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지붕에 설치한 태양 전지판을 통해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해요. 지열을 이용한 냉난방 시스템도 사용 중이고요. 무엇보다 마당에 설치한 워터 커넥션이 집수 시설과 연결돼 빗물을 이용한 청소와 정원 관리가 가능합니다.” 윤서영 문화공보담당관의 설명이다. 마당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 개의 돌이 처마와 체인으로 연결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 레나 마리아 튀링 Lena Maria Thüring의 작품으로 비가 내리면 물이 체인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난 홈을 따라 한곳으로 모이게 되는 구조다. 물길은 한강의 흐름을 형상화했으며, 바닥에 놓인 세 개의 돌은 각각 라인 강, 론 강, 티치노 강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섬세한 부분에서도 느껴지는 한국과 스위스 양국의 교류 덕분에 올해로 수교 60주년이라는 뜻깊은 시간을 맞이했다. 그동안 주한 스위스 대사관은 다양한 문화 행사를 통해 폐쇄성과 높은 장벽을 과감하게 허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개관 2주년을 기념하며 2021년에 개최한 사진전 <숨쉬는 벽>, 2022년에 개최한 <스페이스리스 Spaceless> 사진전 등이 바로 그 예. 더욱 친근하게 다가올 주한 스위스 대사관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다목적실. 정사각의 창은 시간에 따라 변모하는 풍경화이기도 하다.
USM 가구로 꾸민 회의실. 창 너머로 싱그러운 자연이 펼쳐진다.
INTERVIEW
아틀리에 오이_패트릭 레이몽 Patrick Reymond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서 60주년 기념 행사가 있어 참석차 왔다.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각 나라가 지닌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것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이번에는 비록 짧은 방문이지만 9월경 다시 방문해 좀 더 오래 머물 예정이다.
주한 스위스 대사관 곳곳에 아틀리에 오이의 작업이 있는데, 첫인상은 어떠했나?
이번이 처음 방문했지만 수많은 미팅을 했기에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스위스와 한국 전통 가옥의 모습이 동시에 느껴져서 매우 흥미로웠다. 동서양의 조화가 잘 나타나는 것 같다.
스위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이나 자연환경이 당신의 디자인 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스위스의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은 작품 활동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스튜디오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 라 누베빌 La Neuveville에 위치한다. 유럽의 북부와 남부의 중간 지점이자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이다. 호수와 산 등 자연환경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으며, 그 자연의 변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다.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나?
좋은 디자인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제품을 사용할 때 드는 감정과 분위기,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좋은 디자인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이는 굉장히 전형적인 스위스스러움이다. 평생 사용할 수 있는 까렌다쉬 펜슬이 그렇다. 나는 지금도 1968년에 생산된 올드카를 타는데, 굉장히 흔한 일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협업을 진행해왔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협업이 있나?
2006년 포스카리니와 함께 작업했던 조명 디자인 전시다. 밀라노에서 전시를 진행했는데, 조명임에도 불구하고 사운드를 이용해 전시했다. 전시장 분위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분야에 제약이 없다면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디자인 영역이 있나?
호텔을 꼽고 싶다. 교토와 프라하에서 호텔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호텔을 디자인하는 일은 굉장히 복합적이다. 일반적인 건축이나 인테리어, 제품 디자인을 넘어 스토리와 장면, 분위기, 총체적인 경험을 아울러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틀리에 오이 멤버인 패트릭 레이몽. 위쪽에는 그가 디자인한 퓨전 조명이 걸려 있다.
응접실 바로 옆에 자리한 VIP 다이닝룸. 오른쪽에 걸린 회화는 르네 레비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