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르씨지엠은 건축과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튜디오다. 이처럼 모호한 경계는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까지 가닿는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집이 갤러리 같은 집이에요. 너무 칼같이 재단된 집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 않나요? 벽에 가족사진도 걸고, 알록달록 생활감도 좀 있고. 큰 범위 안에서 흐트러지지만 않는다면 그게 좋은 집이거든요. 물론 저희는 철저한 계산하에 공간을 만들지만 일일이 클라이언트에게 강요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메타포가 있는 공간이 좋아요. 매일 다르게 보이고, 개입할 여지가 있는 거죠. 명확하지 않고, 얼레벌레하면서 흐리멍텅한 디자인이랄까요(웃음).” 그는 시처럼 함축적인 텍스트를 즐겨 읽는데, ‘모던클래식 스타일’보다는 ‘슴슴한 맛’, ‘칼칼한 맛’이 나는 공간처럼 이미지는 떠오르되 규정되지 않은 열린 상태에 마음이 간다. 시각적인 것을 넘어 촉각, 향, 울림 등 공감각적인 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비슷한 이유. “헤르만 헤세의 시 가운데 ‘안개 속을 거닌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이 바로 안개를 만드는 일이에요. 모호한 경계 속에서 뭐 하나 거슬리는 것 없이 모든 사물이 조화롭게 구현되는 상태요. 단순하게 하되 우아함은 잃지 말자. 그래서 저희가 상업 공간을 잘 못해요(웃음). 거긴 정말 명확한 컨셉트로 승부해야 하니까요.” 사무실 바로 위층은 그의 거주 공간. 그에겐 평범한 일상이 모두 영감이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팀원들이 출근하기 전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식물에 물을 주고, 야고와 야야의 밥을 챙기고, 음악을 틀고 사무실을 청소하는 그런 소소한 일상 말이다. 삶과 주변을 더 섬세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관심이 모여 결국 그를 이룬다. 2년째 취미로 하는 도자기도 그중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저희는 없거든요. 끊임없이 외부와의 불합리한 관계 속에서 조율해 나가야 하죠. 도자기는 그래도 제 마음대로 완성할 수 있더라고요. 도자기를 시작한 이유로 스트레스도 줄고 남들에게 확실히 관대해졌어요. 요즘에는 사계절이 바뀌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래서 그렇게 나이든 사람들이 꽃 사진을 찍나 싶다니까요.”르씨지엠의 디자인 철학
공간 디자인계의 선비라 불리는 르씨지엠 구만재 소장. 그가 생각하는 좋은 집이란 눈이 아닌 발로 읽히는 공간이다.
“이 사무실은 15년이 됐어요. 제가 한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무작정 파리로 유학을 갔었거든요. 공간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처음 설계한 곳이에요.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는 곳이죠.” 호젓한 주택가에 자리한 르씨지엠의 사무실, 대로에 면한 계단을 따라 반 층 정도 내려가면 아홉 명의 팀원과 반려견 야고, 반려묘 야야가 함께하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에 자리한 대형 테이블. 열 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이 공간은 회의실 겸 응접실이자 식당, 와인 바, 카페다. 한 켠에 자리한 빈티지 스피커에서는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비가 오는 날이면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멍을 때리는 사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무실 어디에도 구만재 소장의 개인 자리가 없다는 것. 매일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이곳저곳에서 업무를 보기 때문에 자리 같은 건 필요가 없단다. “입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듣는 것,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잘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본인과 닮아 있어야 진심인 거죠. 예를 들어 디자인하는 공간은 세련되고 휘황찬란한데 늘 추리닝을 입고 다닌다? 그런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 좀 있달까요.” 사무실 곳곳에는 그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집품이 자리한다. 현장에서 주워온 대리석 바닥, 100여 년 전 누군가의 열정이 담긴 식물도감, 유리 공장에서 무심하게 툭툭 잘라 내버린 유리 조각들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