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비 눈에 띄게 증가한 참가 브랜드와 관람객 수, 개최기간 동안 온라인에서 포스팅된 게시물 수, 체험과 토크쇼 등 다양한 프로그램, 그리고 3일로 확대된 퍼블릭 데이. 양적 또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한 워치스 앤 원더스 2024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시계 전시회로 자리 잡았다.
패션 하우스의 약진
에르메스 아쏘 뒥 아틀레.
에르메스, 샤넬, 루이 비통 같은 패션 하우스의 이름을 시계 전시회에서 보는 일은 낯설지 않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브랜드들은 시계 만들기에 적극적인 패션 하우스의 면면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자유로운 관점, 시계업계의 화법을 탈피한 참신한 디테일과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에르메스는 컴플리케이션 워치 아쏘 뒥 아틀레 Arceau Duc Attelé로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정의했다. 에르메스 로고인 마차를 테마로 한 기능과 디테일을 시계 세계로 가져왔다. 마치 공처럼 회전하는 투르비용, 말 머리 모양의 리피터 해머와 부품, 마차의 바퀴살을 묘사한 휠 디테일은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신선한 시도다. 디테일 이상으로 수준 높은 기능이 돋보인다. 빠르게 회전하는 투르비용은 중력 영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소리 굽쇠 모양의 리피터 공은 더욱 큰 울림으로 시간을 소리로 전달한다.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의 오트 쿠튀르를 테마로 쿠튀르 어클락 Couture O’Clock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다. 오르골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탁상시계에서 J12, 보이- 프렌드, 프리미에르 컬렉션을 아우르는 비범한 스케일로 그려냈다. 동시에 31 루 캄봉 Rue Cambon에 있는 아틀리에의 일상이나 줄자, 가위, 바늘 같은 쿠튀르 도구를 이용한 디테일은 섬세하고 때론 위트와 재치를 선사한다. 모든 요소 또한 시계 기능에 녹아들었음은 물론이다. 생산거점 라 파브리끄 뒤 떵 La Fabrique du Temps 루이 비통을 완성한 루이 비통은 진보를 거듭해 감각적인 워치 메이킹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야제 플라잉 투르비옹 플리크아주르 Voyager Flying Tourbillon Plique-à-jour는 알파벳 V를 모티브로 투르비용의 기술적, 예술적 면모를 동시에 전달한다. 투르비용의 V 모양 케이지를 시작점으로 스켈레톤 가공한 플레이트에 고전적인 반투명 에나멜 기법 플리크아주르로 마무리했다. 투르비용의 조형미와 시계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에나멜 기법을 조화롭게 엮어낸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샤넬 꾸뛰르 어클락.
루이비통 보아제 플라잉 투르비용 플리크아주르.
빅 마일스톤
랑에 운트 죄네 다토그래프.
1999년 독일 하이엔드의 자존심,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계 만들기와 독창성을 내건 크로노그래프 다토그래프 Datograph가 랑에 운트 죄네에서 등장한다. 큰 날짜창과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각 중심축은 외관만으로도 독창적이고, 그 아래의 메커니즘은 더욱 독창적이었다. 다토그래프 탄생 25주년을 맞이해 두 가지 한정판을 소개했다. 다토그래프에 특별한 외관을 부여한 화이트 골드 케이스와 블루 다이얼 버전과 랑에 운트 죄네가 특별한 순간에 사용하는 허니 골드 케이스에 야광 다이얼을 사용한 ‘다토그래프 퍼페추얼 투르비용 허니 골드 루멘 Datograph Perpetual Tourbillon Honey Gold Lumen’이 25주년을 자축했다. 설립 150주년을 맞이한 피아제는 1979년 선보인 ‘폴로 Polo’를 45년 만에 ‘폴로 79’로 재탄생시켰다. 이브 피아제 Yves Piaget는 드레스 워치가 중심이던 과거, 라이프스타일과 복식이 변화하며 그에 어울리는 시계가 필요해진 상황을 캐치했다. 스포츠를 즐기는 고객에 부응하기 위해 상류 사회의 스포츠를 상징하는 폴로를 새로운 시계의 이름으로 삼았다. 폴로는 다이얼, 케이스 그리고 브레이슬릿이 완전히 하나로 통일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가드룬 Gadroon과 잉곳 Ingot 링크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패턴은 기하학적 조형미와 논리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폴로의 독보적인 프로포션은 당시 가장 얇은 칼리버 덕분이며, 새로운 폴로 79 역시 현재의 얇은 칼리버로 고유한 디자인과 두께를 실현했다.
피아제 폴로 79.
0.01mm의 격차, 울트라 슬림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트 투르비용.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COSC.
가장 얇은 시계를 뜻하는 울트라 슬림은 빼기의 세계다. 두께를 줄이기 위해서 기능을 빼고, 케이스의 질량을 덜어낸다. 간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리 녹록지 않다. 높은 기술력을 갖춘 하이엔드 브랜드가 독무대던 사실이 증명하는 바다. 불가리는 울트라 슬림에서 신입에 가깝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의 기간 동안 가장 얇은 시계라는 기록을 장르마다 줄줄이 갈아치웠다. 2022년 두께 1.80mm, 20유로 센트 동전의 두께와 다름없는 시계 케이스에는 시계 부품을 빼곡하게 채워넣고 울트라 슬림의 왕좌에 오르며 경이적인 기술력을 뽐냈다. 하지만 두께 1.75mm의 리차드 밀 RM UP-01 페라리의 등장으로 불과 몇 개월 만에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내리게 된다. 올해 불가리는 두께 1.70mm의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Octo Finissimo Ultra COSC’로 다시 왕좌에 올랐다. 케이스 부품을 극한에 가깝게 줄여낸 덕분이다. 게다가 정확한 시계를 의미하는 COSC 인증까지 받았다. 한편 울트라 슬림의 꾸준한 강자인 피아제도 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핸드와인딩 투르비용 장르에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트 투르비용 Altiplano Ultimate Concept Tourbillon’은 두께 2mm를 실현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부품을 통합하고, 새로운 소재를 사용해 강성을 향상시킨 결과다. 두 시계가 나란히 가장 얇은 두께를 기록해 울트라 슬림의 해로 기록될 듯하다.
진화하는 컴플리케이션
IWC 포르투기저 이터널 캘린더.
바쉐론 콘스탄틴 더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의 꽃’ 컴플리케이션은 말처럼 복잡한 시계다. 각 브랜드의 기술력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시계의 경이로움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놀라운 컴플리케이션 신작이 다수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가장 복잡한 시계의 칭호를 받은 바쉐론 콘스탄틴의 ‘더 버클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The Berkley Grand Complication’은 최초로 중국력을 퍼페추얼 캘린더로 구현함과 동시에 무려 63개의 기능을 담았다. 케이스 앞뒤의 다이얼을 가득 채운 무수한 인디케이터는 시간과 우주를 응축한다. 영원에 대한 찬사를 내세운 IWC는 3999년까지 날짜 수정이 불필요한 ‘포르투기저 이터널 캘린더 Portugieser Eternal Calendar’를 선보이며 퍼페추얼 캘린더의 진화를 선언했다. 불규칙한 그레고리력을 시계 속에 프로그램해 날짜를 표시하는 퍼페추얼 캘린더는 완전해 보이지만, 100년, 400년 뒤의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면 내포된 불완전성이 나타난다. 이 부분을 심플한 메커니즘으로 보완해 영원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매년 한계라고 여기던 컴플리케이션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사이즈의 재정립
태그호이어 포뮬러 1키스
블랑팡 피프티 패덤스.
2010년대는 가히 빅 워치의 시대로 회상될 것이다. 스포츠 워치는 지름 45mm가 표준이었고, 드레스 워치는 지름 40mm에 육박했다. 1990년대와 비교하면 평균적으로 4~5mm의 지름이 커진 셈이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는 법. 한계를 모르고 커지는 시계 지름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소비자, 아시아 시장의 강세는 시계 사이즈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패션 브랜드 키스 Kith와 손잡은 태그호이어는 1985년의 헤리티지를 되살린 ‘포뮬러 1’ 컬렉션을 공개했다. 원색의 강렬한 컬러와 함께 35mm 지름이 인상적이다. 요즘 기준으로는 조금 큰 여성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도지만, 1980년대 감성을 살리기 위한 주요 요소로 작은 지름은 필수적이다. 하이엔드 다이버 워치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한 블랑팡은 ‘새 피프티 패덤스 Fifty Fathoms’ 컬렉션의 사이즈를 42.3mm로 결정했다. 45mm에 달하던 케이스를 작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름 축소에 따른 디테일을 재정비해 가장 보기 좋은 형태를 완성했다. 레드 골드와 23등급 티타늄 소재, 빈티지한 느낌의 트로픽 Tropic 러버 스트랩으로 완성도를 한층 더 향상시켰다.
클래식이여 영원하라
롤렉스 퍼페추얼.
까르띠에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1990년대 후반 기계식 시계가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들자 까르띠에는 위축된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의 마스터피스를 재현한 ‘CPCP(Collection Privée Cartier Paris)’ 계획에 시동을 걸었다. 그 하나에 포함된 시계가 이번에 재공개한 ‘똑뛰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Tortue Monopusher Chronograph’이다. 1928년 까르띠에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로 거북이 실루엣 모양의 똑뛰 케이스에 측정 기능을 장착해 우아하면서 기능적인 면모를 발휘했다. 오리지날은 거의 100년 전 시계지만 진정한 타임리스 클래식의 아름다움은 변함없다. 롤렉스의 ‘퍼페추얼(Perpetual) 1908’은 그보다 20년 더 과거의 시계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클래시컬한 핸즈, 쌀알 모양의 기요세 다이얼과 코인 에지 베젤의 케이스 디테일은 시계의 시대를 암시하는 한편, 아이스 블루로 다이얼을 물들여 모던 클래식을 완성했다.
그린 그러데이션
오버시즌 그린.
까르띠에 산토스 그린.
소파드 L.U.C XPS 그린.
시계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다이얼은 소재, 컬러, 패턴, 광택 등 다양한 요소가 상호유기적으로 작용해 완성된다. 그중에서 컬러는 시계의 느낌을 전달하는데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며, 유행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시계업계에서도 드물게 유행을 타는 분야다. 그린 컬러는 대세로 자리 잡은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강세다. 호불호가 크지 않고 눈에 편안한 컬러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린 다이얼을 여러 브랜드에서 선보였다. 전부 그린이라고 칭하지만 한데 늘어놓으면 세밀하게 변하는 그린 그러데이션을 만들 정도로 미묘하게 컬러와 톤의 차이를 보인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스포츠 워치 오버시즈 Overseas는 로즈 골드 케이스와 잘 어울리는 변화무쌍한 그린 다이얼을 소개했다. 까르띠에 산토스 뒤몽 Santos Dumont의 생동감 넘치는 그린, 쇼파드 L.U.C XPS 포레스트 그린의 마치 울창한 숲과 같은 짙푸른 그린까지 그린의 스펙트럼은 실로 폭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