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이면서 이탈리아에서 오래 거주한 덕분에 섬세하고 우아한 프렌치 감성과 대담하고도 세련된 이탤리언 감성을 멋지게 믹스하는 디자이너 필립 니그로 Philippe Nigro. 신인이나 다름없던 시절, 에르메스와의 작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최근 더 많은 브랜드와 경계 없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밀라노에서의 축제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간 그와 새로운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상당히 많은 브랜드와 협업한 결과물이 나왔는데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하나의 디자인이 나오려면 1년에서 1년 반 정도가 걸린다. 처음 6개월간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테크니컬한 드로잉 작업을 하고, 브랜드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미팅하며 작업을 완성해간다.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만, 상황에 대처하면서 정신없이 보낸다.
이탈리아 브랜드와 많은 작업을 했는데, 프랑스 디자이너로 자신의 스타일과 어떻게 믹스했는가? 디자이너는 사용자 입장에서의 기능적인 필요성, 만드는 기업 입장에서의 생산적인 필요성에 모두 적절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실제 작업에 들어가기 전 의뢰한 브랜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프렌치 스타일이라…(웃음). 어떤 게 프렌치 스타일인지 말한다 게 어렵지만 이탈리아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브랜드 문화나 그들의 방식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의자 디자인이 많다. 의자가 특별히 매력적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의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상황들과 관련돼 있는데 특히 소파는 완벽한 휴식을 주고 공간에 디자인 요소로 굉장히 중요한 가구라서 매력적이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큰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게 의자와 소파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운 브랜드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은 새로운 관계 맺기를 좋아하나? 디자이너는 엄청 많지만, 그에 비해 브랜드는 상대적으로 적다. 새로운 브랜드와 관계를 만드는 데 항상 열려 있어야 하는데, 새로운 관계에서 배우는 게 많기 때문이다. 사실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이 부분이 쉽지만은 않다(웃음).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 브랜드와 이해관계를 넘어 서로 이해와 신뢰를 형성할 수 있고, 결국 좋은 디자인으로 이어진다.
자노타에서 선보인 ‘루이스’ 체어
각기 다른 브랜드와 작업하더라도 언제나 표현하고자 하는 필립 니그로 스타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인가? 스타일로 정의하기보다는 함께 일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드러나되, 미적이거나 테크닉적인 면에서 내 색깔이 녹아나는 방식을 취한다. 자신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규모나 명성에 관계없이 작거나 큰 브랜드 혹은 어느 지방에 있는 장인과도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디자이너의 적절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매년 밀라노를 방문하는데, 올해는 개인적으로 어떠했는가? 밀라노라는 도시가 좁게, 열흘 정도의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많은 행사가 추가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매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브랜드 부스와 행사 때문에 마음껏 구경할 수는 없다는 걸 항상 아쉬워한다.
산 펠레그리노를 위한 리미티드 에디션 작업은 어떠했는가? 지금까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분야였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배운 ‘모든 것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 작업으로 해보는 기회였다. 100년 가까이 된 헤리티지를 탄산수의 버블로 표현하되, 모던한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탄산수의 실키한 버블이야말로 산 펠레그리노의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완전한 백지 상태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크로키를 많이 그린다. 누가 보면 그냥 쓱쓱 낙서하는 것 같을 수도 있는데,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디자인 프로세스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동안 머릿속이 정리되면서 어떤 디자인을 할 것인지 대부분 결정한다. 컴퓨터 작업은 구상이 전부 끝나고 나서 시작된다.
요즘 개인적인 관심사가 있다면? 파리는 항상 새로운 전시가 열리고 실험적인 공간이 오픈하는 도시다. 최근에 파리에서 본 마르지엘라 전시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의 디자인 세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은 어떤 곳인가? 파리와 니스 그리고 밀라노를 오가며 살았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공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어떤 스타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편안하고 영감을 주는 곳을 노마드처럼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가는 ‘형태’다.
산 펠레그리노를 위한 스케치
GTV에서 선보인 ‘프롬나드’ 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