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미술의 매개체, 박여숙화랑

세상과 미술의 매개체, 박여숙화랑

세상과 미술의 매개체, 박여숙화랑
갤러리는 그저 그림을 걸고 파는 공간이 아니다. 작가와 그의 작업이 세상과 관계 맺도록 다리를 놓는 갤러리로 지난 40여 년간 역할해온 박여숙화랑이 청담동 시대를 끝내고 이태원 소월길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청담동 미술 거리, 박여숙, 박여숙 화랑, 이태원 소월길청담동 미술 거리를 대표해온 박여숙 대표. 1983년에 개관한 박여숙화랑이 청담동을 떠나 이태원 소월길로 터전을 옮겼다.
 
신축한 박여숙화랑 건물의 담백하고 차분한 외관.
    미술관이 비상업적인 전시 공간이라면, 갤러리는 미술 작품의 판매가 이뤄지는 상업적 공간이다. 그런 이유로 갤러리를 미술관에 비해 한 치 아래로 평가한다면 억울하다. 갤러리를 돈이 오가는 공간, 미술의 순수성보다 상업성에 주목하는 미술품 거래의 장소로만 보면 건강하고 풍성한 미술 생태계 조성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좋은 갤러리는 작가와 컬렉터, 관객, 평론가로 구성되는 미술이라는 유기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혈액과 같은 존재다. 작가가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계기와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모두 갤러리의 몫이다. 물론 이런 과정을 통해 갤러리 역시 성장한다. 가고시안, 화이트 큐브, 페로탱 등과 같은 세계적인 갤러리가 그렇게 전 세계 미술계의 핵을 이루는 작가들을 발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건축 잡지 <공간> 취재 기자와 짧은 큐레이팅 경험을 가진 젊은 여자가 겁도 없이 자기 이름을 걸고 1983년 문을 연 갤러리가 박여숙화랑이다.  
찻집, 공예 갤러리, 수수담담찻집이자 공예 갤러리로 활용될 공간 ‘수수담담’. 층고에 비해 가로로 긴 구조 때문에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처음 화랑을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이름 있는 몇몇 작가에 의해서 미술계가 흘러갔어요. 새로운 작가, 좋은 작가가 많은데 왜 화랑에서 전시를 못하나 아쉬움이 있었죠. 제 나름대로 젊은 작가들을 끌어내서 화랑이 꾸준히밀어주고 컬렉터와 작가, 갤러리가 같이 성장하도록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쉽지 않았죠. 갤러리는 기획도 좋아야 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작품 판매를 잘해야 해요. 제가 판매를 잘 못해서 힘들었어요. 상술이 부족했겠죠. 어떻게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아름다운 걸 발굴하고 알리는 일이 너무 좋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끈기 있게.”  
뷰잉룸, 박여숙화랑, 아트, 갤러리사무 공간 옆에 별도로 마련된 뷰잉룸 Viewing Room.
 
컬렉션, 공예, 작품, 갤러리, 오피스 인테리어 스타일링박 대표의 사무실 풍경. 공예 작품 컬렉션은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맹랑한 도전이었지만 문화의 불모지 같았던 강남에서 40여 년 가까이 미술과 작가들의 곁을 지키며 박여숙화랑은 결국 대표적인 국내 갤러리 중 하나가 됐다. 작고한 김점선 작가를 처음 세상에 알린 것도, 지금은 ‘설악산 화가’로 불리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 김종학 작가를 산중에서 끌어낸 것도 모두 박여숙화랑이었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국내외 작가들이 박여숙화랑을 거쳐갔다. 한창 국내 미술계가 호황을 누리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박여숙화랑이 기획하는 전시의 주목성 때문에 한동안 못 봤던 기자들도 박여숙화랑의 기자 간담회에 가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곧이어 호황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세계 불황이 들이닥쳐 미술계를 위축시켰다. 박여숙화랑도 그 시절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버텨냈다 . 청담동 화랑가의 대모로 불리던 박여숙 대표는 최근 길었던 청담동 시대를접고 이태원 소월길에 새 터전을 잡았다. “여기가 좋아요. 남산도 좋고, 이태원의 역동적인 분위기도 좋고. 강남과 강북 어느 쪽에서도 오기 편한 것도 마음에 들어요. 아직 어색하긴 해요. 습관적으로 강남으로 갈 때가 있어요(웃음). ”  
이태원, 조하나, 미궁의 표상, 전시회, 갤러리, 아트 워크박여숙화랑의 이태원 시대는 공예 작업을 자주 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하나 작가의 <미궁의 표상>전이 현재 전시 중이다.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정제된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4층 규모의 화이트 신축 건물은 한결같은 커트 머리와 과장 없이 미니멀한 스타일을 고집하는 박여숙 대표와 어딘가 닮아 있다. 전시 공간과 사무 공간 외에 찻집을 겸한 공예 전시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수수덤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수수하고 덤덤한 것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에서 한국 공예 전시 미술 감독을 했는데, 그때 타이틀이 ‘수수, 덤덤, 은은’ 이었어요. 거기에서 이름을 따왔죠. 국적 있는 미술을 표방하고 있어요. 1990년대부터 단색화를 유럽에 많이 알렸고, 회화를 당연히 계속 하겠지만 공예를 많이 소개하려고 해요. 가장 자신 있고, 알리고 싶은 분야예요. 전시 기획을 하면서 느낀 점이 공예 인구는 많은데 시장이 없고, 특히 갤러리스트가 드물어요.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것을 널리 소개하는 기획을 하고 싶어요. 찻집을 통해 보급하고 쓰임새를 알리려고 합니다.”  
박여숙 인터뷰인터뷰 중인 박여숙 대표. 절제된 표현에 분명한 생각과 의지가 담긴 언어가 그의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지난 10월 10일부터 이전 기념 개관전이 열리고 있다. 조선 백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탁월한 미적 통찰을 통해 현대적으로 구현한 백자 작업을 선보이는 권대섭 작가의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45cm가 넘는 대형 작품을 포함해 총 18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강건한 몸체와 오묘한 색감이 빚어내는 엄청난 존재감의 작품이지만, 완성도에 대한 작가의 집념과 고집 탓에 1년에 겨우 6점의 백자 항아리만이 완성된다. 지난 2015년과 2018년에는 벨기에 출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아트 컬렉터, 큐레이터인 악셀 베르보르트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의 백자 시리즈는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멕시코 국립박물관, 러시아 국립박물관과 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11월 11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권대섭전, 백자, 악셀 베르보르트, 전시회, 항아리박여숙화랑 이태원 이전 기념 개관전으로 열리고 있는 <권대섭 展>은 11월 11일까지 계속된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작가의 투혼이 고스란히 담긴 18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박여숙화랑 이전 기념 개관전 <권대섭 展>

일시 10월 10일부터 11월 11일까지
장소 용산구 소월로 38길 30-34 박여숙화랑
문의 02-549-7575

CREDIT
포토그래퍼 안종환
writer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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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REATOR 과거를 디자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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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REATOR 과거를 디자인하다
빈티지 레트로 스타일이 주목을 받으면서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복고풍 인테리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10~20대에게는 낯선 매력으로 다가가기 때문일까.  

  레트로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싶다. 조인혁 디자이너는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적절한 시기까지 맞아떨어져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로 자리 잡았다. 그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프릳츠와의 인연이 궁금했다. “프릳츠와는 TRVR의 정승민 대표님의 소개로 만났어요. 평소 한글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제게 한글을 이용한 로고 디자인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1990년대 레트로풍의 한국식 디자인을 요청하는 클라이언트가 늘어났죠.” 현재 ‘조인혁=레트로’라는 공식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이전에 다녔던 직장의 영향이 컸다. “처음부터 레트로 스타일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예전 직장이 미국 빈티지 스타일의 패션 회사이기도 했고 프릳츠와도 한글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당시 분위기를 연구하고 공부하다 보니 스타일이 더욱 확고해진 것 같아요.”  
을지로3가 프로젝트, 신한카드신한카드에서 주최한 ‘을지로3가 프로젝트’에 출품한 작업.
 
카린지, 디자인 포스터, 레트로카린지의 대표 메뉴 돈가츠 카레를 디자인한 포스터.
 
프릳츠 디자인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 ‘프릳츠’ 디자인.
  요즘 들어 빈티지 스타일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거리를 거닐며 우리가 쉽게 접하는 것은 현대식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조인혁 디자이너는 과연 작업을 위한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했다. “오래된 동네를 자주 다녀요. 옛날에는 한글 모양도 조금씩 차별화되어 있고 마감재나 디자인이 오히려 독특하고 재미난 것이 많아요. 요즘에는 온라인으로 쉽게 유행하는 것을 보고 배우지만, 1990년대만 해도 정보가 부족해 각각의 개성이 강한 것 같아요.” 그는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회사와 프리랜스 일을 병행하다 최근 독립했다. 직접 브랜딩부터 디자인, 인테리어까지 도맡아 진행한 레스토랑 카린지 옆에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가끔 지칠 때가 있어요. 디자이너로서의 제 이름을 걸고 주도적으로 작업해보고 싶었고, 그 첫 번째 결과가 카린지예요. 앞으로는 스튜디오 일부를 활용해 카페를 오픈할까 생각 중인데, 편집숍이 될 수도 있고요. 아직 확정된 것은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해보려고요.” 조인혁 디자이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미 대중에게 인정받은 경험을 밑거름 삼아 다양한 분야로 나아가는 중이다.  
브랜딩 인테리어 디자인, 레트로 복고 스타일그가 직접 브랜딩하고 인테리어까지 담당한 레스토랑 카린지는 레트로풍에 걸맞는 복고 스타일로 인테리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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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REATOR 대를 이어가는 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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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우리나라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김영훈 파티시에는 그 어려운 행보를 택한 흔치 않은 사람이다.  

김영모 파티시에, 제과 명장

  우리나라 최초의 제과 명장인 김영모 파티시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대째 제과의 대를 잇고 있는 그는 작년 말 30대라는 이른 나이에 프랑스 명장 자격인 MOF(Meilleur Ouvrier de France)를 획득했다. 본래 프랑스인의 전유물 같았지만, 김영훈 씨가 아이스크림 분야의 MOF를 취득함에 따라 외국인 최초로 명장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제과, 제빵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과, 제빵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친숙했지만, 배움의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고 했다. “리옹에서는 학교에서 이틀, 현장에서 나흘 일하는 식으로 공부했어요. 일종의 도제 시스템처럼요. 매일 새벽 4시에 제과점에 나가 일을 하는데 진짜 힘들더라고요. 이 길이 맞는 건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견습하던 제과점에서 도망쳐 한 달간 잠수를 타기도 했고요(웃음).” 어린 마음에 세계 대회만을 목표로 테크닉에만 집중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큰 스승이었던 가브리엘 파야송 Gabriel Paillasson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지, 기술인이 되고 싶은 건지 물으며 꾸짖었다. 정말로 기술인이 되고 싶다면, 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노력하지 않느냐며 말이다. 그때부터 그는 제과 현장에서 기초를 닦고 테크닉보다는 ‘맛’이라는 기본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2013년 세계 대회에 나가 ‘작품’이 아닌 ‘제품’으로 상을 탔다. 프랑스 장인이 된 그는 다시 아버지 밑으로 돌아와 김영모 제과점으로 출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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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장도 됐으니, 좀 더 젊었을 때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묻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아버지 밑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김영모 제과점은 아버지의 회사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제과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잖아요. 제과 역사는 길어봤자 2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이만큼 성장했고 나름 우리의 스타일이란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지 틀리고 잘못된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의 실정에 맞게 선배들이 만들어낸 변화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기초를 무시하고 제가 봐온 것들로만 한다? 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은 아버지 것을 제대로 배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우리의 전통을 탄탄히 배우고, 언젠가 먼 미래에는 자신의 것을 접목시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또 후배들한테 전수하고자 한다. 그 과정을 준비하는 게 앞으로 10년의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김영훈 파티시에는 먼 시간을 바라보며 천천히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펼쳐진 미래는 왜인지 선명한 듯 보였다.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어린왕자>를 주제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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