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이 됐을 때도 닫혀 있던 문은 80살이 다 되어서야 한 치 틈을 열었다. 어떤 양식과 전통에도 매인 적 없는 자유로운 그림쟁이
황영자의 천재적 작품 세계가 이제서야 세상과 접선을 시작했다.
황영자 선생과의 첫 인터뷰는 8년 전 겨울이 끝날 즈음이었다. 그의 파주 작업실은 외딴 농지 한복판에 허술하게 지어진 가건물이었다. 때 탄 채로 지겹게도 녹지 않는 눈이 빚어내는 풍경보다 더 삭막했던 건 그림한테만 친절하고 사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길 없는 작업실이었다. 손이나 잠깐 녹여줄 난로 두어 개로 고희의 작가가 하루 9~10시간 신들린 사람처럼 끼니를 잊어가며 그림만 그리게 만드는 동력은 예술혼처럼 고아한 어휘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도 우선될 수 없었던, 나와 그림이 구분되지 않는 처절하고 맹렬한 그림쟁이의 고된 노동은 그보다 원초적이고 고통스러운 운명 같았다. 작품은 엄청났다. 강렬한 색감과 표현의 에너지가 무시무시했고, 작가의 설명 없이는 이해할 길이 없는 도상으로 가득했다. 대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가 작가 자신이라는 것만큼은 자명했다. 세상과 불화하고, 자신과도 원만하지 못한 여자의 고독과 신경증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주로 화면 속에 혼자였고, 다른 존재와 함께 있을 때조차 눈을 맞추는 법이 없었다. 선생의 첫인상은 평범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그림 속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상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허용되는 패션 위크에서나 볼 법한 대담한 옷차림과 신경줄이 있는 대로 팽팽해진 것이 가감 없이 느껴지는 시선이 모두 그랬다.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상처와 욕망을 감추는 기술을 배워본 적 없는 선생의 아이 같은 천진함을 조금쯤 엿볼 수 있었다. 분홍신의 저주처럼 끝까지 볼모로 잡혀 그림만 그려야 하는 운명도 있나 보다.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 괴롭고 힘들었다.
왼쪽 사랑의 슬픔(비나리), 91×117cm, Acrylic on Canvas, 2016. 오른쪽 붉은 여왕의 법칙, 162×130cm, Acrylic on Canvas, 2012.
왼쪽 하늘 길, 112×162cm, Acrylic on Canvas, 2016. 전생, 117×80cm, Acrylic on Canvas, 2012. 우리는 닮았다, 73×61cm, Acrylic on Canvas, 2014. 포커 페이스, 91×73cm, Acrylic on Canvas, 2019.
세월을 돌고 돌아 며칠 전 선생을 다시 만났다. 가속도가 붙는 황혼의 시간이 8년이나 흘렀지만, 선생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는데, 얼마 전 치른 청주시립미술관 기획전 <놓아라>의 여운 탓인 듯했다. 그림과 인생을 평행선상에 두고 작업실에서 그림과 홀로 대결하며 살아온 그에게 파릇한 젊음의 관객들과 마주 보고 교감하는 경험은 생경하면서도 설레는 것이었다. 황영자라는 발견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새로 기획된 전시 <나는 그림쟁이다>가 지난 10월 4일부터 11월 29일까지 신사동 가로수길 UM 갤러리에서 열린다.
몽상가, 117×91cm, Acrylic on Canvas, 2015.
아프다, 45×38cm, Acrylic on Canvas, 2009.
늙어가는 노래, 162×112cm, Acrylic on Canvas, 2017.
“사람들이 내 그림에 거부감이 있고 무섭다고 생각해서 살아 있을 때 내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냥 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내 생각만 그리면 된다, 그랬거든. 30~40년을 고생만 하다가, 이상하게 그림 그리면서 가난해졌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 그리면 화실비도 내야 하고 재료비도 써야 해서 그런 거겠지. 그림만 그리니까 식구들도 나를 환영 안 하고. 그러다가 2년 전에 그림을 접었어요. 그림도 창고에 넣고.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연락이 와서 그림을 다시 꺼냈는데 그거 정리하는 데만 7~8개월이 걸리더라고.”
선생의 그림 중엔 대작이 많다. ‘그래야 화풀이가 되니까’. 연원을 찾자면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야 하지만, 시작의 이유를 따진들 무엇 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림에 대한 자신감과 살아갈 기운을 찾으려고 그렸던 대작이 지난 전시에서 빛을 발했다. 미술계의 몇몇을 제외하고 알아주는 사람 없이 평생을 그려왔던 그림에 대한 젊은 관객들의 새삼스러운 환호는 마땅히 표현할 말도 찾기 힘들 만큼 낯설었고, 쑥스럽게 기뻤다. “좋았지 뭐. 남들 앞에서 당당하지도 못하고, 작업실에만 있어 버릇하니까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법도 잘 모르고.”
단추 정원, 117×91cm, Acrylic on Canvas, 2013.
어떤 양식과 전통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의 천재성이 너무 늦게 발견됐다. 안타까울 필요는 없다. 용서와 화해, 사죄가 구분 없이 버무려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제법 많은 것이 아물고 여물었다.
“그보다 이제는 너무 각박하게 나를 몰아치지 말자고, 이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 순응하며 살자,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러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렇다고 늙어가는데 뭐 갑자기 크게 달라지겠어? 마찬가지지. 그림이 내 친구예요, 옛날부터. 그림하고 있을 때가 제일 편해요. 그 나이면 붓을 놓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나는 더 좋아지더라고. 여든이면 애기가 된다고 그러던데 그렇게 되니까 더 보이는 게 있어. 예전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어쩌나 주저주저했는데 이제 더 상상을 펼치게 되는 거죠.”
행복했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10시간의 노동 뒤에 손이 저린다고 했고, 누가 그림 산다고 하면 아깝다고 했다. 내 집 안방에서는 자꾸 잠을 깨는데, 작업실에서는 유독 깊은 잠을 자는 이 운명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그림쟁이 황영자. 당신은 평생 그림쟁이다.
황영자 개인전 <나는 그림쟁이다>
일시 10월 4일부터 11월 29일까지
장소 강남구 압구정로 12길 25 UM 갤러리
문의 02-515-3970
고딕, 120×105cm, Acrylic on Canvas, 2018.
윤회의 업, 162×130cm, Acrylic on Canvas Collage, 2015.
과거로의 여행, 130×194cm, Acrylic on Canvas and Modeling compound, 2009.
왼쪽부터 노을빛, 73×61cm, Acrylic on Canvas, 2016. 사랑은 세월 가도 무관하다, 105×120cm, Acrylic on Canvas, 1999~2007. 사랑의 슬픔(비나리), 91×117cm, Acrylic on Canvas, 2016. 전생, 117×80cm, Acrylic on Canva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