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을 색에 담는다면 그것은 원색보다 모호하고 불명확한 반투명에 가까울 것 같다. 만져지는 실체 없이 색과 빛의 층으로만 존재하는 장승택의 작품은 인간의 정신을 닮았다.
장승택은 무서운 작가다.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며 탑을 쌓는 것처럼 연륜을 더해가는 작가들의 의지도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이 세상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순간, 지금까지의 작업을 일체 중단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모색하고 탐험하기를 택하는 그의 한결같은 결단은 단호하다 못해 무섭다. 그는 지금까지 과거의 작업으로 회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단색화 2세대의 대표 작가이자 한국의 미니멀리즘 회화를 얘기할 때 첫손에 꼽히는 작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단색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색의 중첩과 미니멀과는 거리가 먼 지난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결과로써의 작품 밑단에 숨겨둔 작업의 과정까지 들춰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장승택의 미술이다. 그는 붓을 들지 않는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왁스, 레진, 플렉시 글라스 등을 재료로 삼았고, 화염방사기, 촛불, 롤러와 에어 스프레이건과 같은 도구를 붓 대신 사용해왔다.
“회화라는 범주 안에서 많은 실험을 해온 게 사실이죠. 감성적으로 모호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추구하다 보니 그런 물성에 경도된 것도 있어요. 전통적이지 않은 기법과 재료를 쓰면서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좋았어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업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래야 좋은 작가가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시장 논리 때문에 거기 갇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에요. 적어도 그런 데 매몰되지는 말자고 생각해요. 작가를 망치는 요소가 되니까요. 너무 사랑받으면, 하지 말자(웃음).”
지난 11월 12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송아트갤러리에서 열리는 장승택 개인전 <Layer Colors Painting>은 그의 근작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다. 최근 작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30여 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붓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고강도의 육체적 노동을 수반했던 작업 방식과 건강에 위협이 될 정도의 에어 스프레이 작업을 대체할 도구로 붓을 택한 면도 없지 않다. 실제로 그는 농담처럼 “나이가 환갑인데 스프레이 작업 계속하다 죽을까봐 그만뒀다”고도 했다. 그러나 붓을 사용하는 작업이 수월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은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 색채의 단층이 만들어내는 ‘겹의 회화’다. 직접 고안한 대형 붓을 사용하지만 ‘너무 많은 작가의 궤적을 남기는’ 붓의 특성은 위반한다. 일반적인 채색 대신 흔들림 없는 일획으로 화면을 채우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한 색채의 면은 실상 넓고 균일하게 내리 그은 선에 가깝다. 아크릴물감과 특수 미디엄을 섞은 안료로 완성된 색이 충분히 건조된 후에 다른 색을 덧입힌다. 밑작업부터 시작해서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어떤 조력자의 도움도 받아본 적 없는 만큼 모든 컬러를 직접 조색해 사용한다. 투명도가 높은 색은 수십 회 다른 색이 얹히면서 반투명의 상태가 된다. 컬러의 반투명성과 흰색으로 채색된 바탕, 의도적으로 조금씩 다른 폭과 길이로 구성한 색의 마감 선 때문에 관객은 이 같은 작업의 시간성을 고스란히 감지할 수 있다.
장승택의 작업에서 모호하고 불명확한 색채는 외적 세계의 재연과는 거리가 있다. 추상 작업인 탓도 있지만, 그에게 색채는 내적 세계에서 끌어올린 감각과 정신의 실체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된 작품들은 수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그러한 경향을 형이상학적 세계를 지향하고, 자연보다는 인격화된 이상을 추구하는 자신의 성향에서 찾았다. 랜드 스케이프를 연상시키는 가로 그림이 자연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추상성이 높은 작품이 작가와 무척 닮아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상이 있는 작품은 주제가 있고, 풍경이든 사람이든 작가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추상이라는 건 가장 기본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거니까 그 작가다운 게 맞죠. 제대로 된 작업을 한다면. 자기답지 않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예요. 천재거나, 가짜거나(웃음).”
전시를 앞두고 그가 직접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어둠이 내리면 색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설령 그가 빛과 색을 찾는 오랜 탐험의 끝에서 해답을 얻지 못한다 해도 매번 낯설게 새로 시작해온 그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인간 정신의 실체를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인간 정신의 한 끝에 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장승택 展 <Layer Colors Painting>
일시 11월 12일(화)~12월 14일(토)
장소 송아트갤러리
문의 02-3482-7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