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케이스, 에코백, 포스터 등 최근 마티스의 드로잉이 유행이다. 그냥 그렇게 상품만으로 만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마티스에게는 리디아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요즘, 여행의 기분이라도 느낄 수 있는 소품을 주변에 두는 것은 정서적으로큰 도움이 된다. 예술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젊은 시절 모로코와 폴리네시아 등 각국을 여행하며 따뜻한 빛과 색을 작품에 담은 마티스는 어느 더운 여름날, 자신의 방에 직접 수영장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나는 항상 바다를 좋아하는데, 지금은 수영을 할 수 없으니 바다에 둘러싸인 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83세의 나이로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는 건강 상태였지만, 색종이를 오려서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가던 때였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와 갈매기와 물고기까지 마티스의 손에서 쓱쓱 만들어진 파란 이미지들은 눈높이에 맞춰 방의 네 면에 띠처럼 둘러졌다. 이 작품은 현재 뉴욕현대미술관 및 남프랑스의 마티스 미술관에서 볼 수있다.두 미술관 모두 마티스가 머물렀던 방과 같은 크기의 전시실에 작품을 설치했다.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말년에 모델에서 스튜디오 매니저 역할을 했던 러시아 여인 리디아 델렉토스카야Lydia Delectorskaya(1910~98년)다. 리디아는 혁명기에 의사였던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에서 생활하다 의사의 꿈을 품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우선 니스에 정착해 마티스의 집안일을 돕는 것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마티스가 ‘차가운 공주’라고 불렀던 리디아는 아름다웠고 똑똑했다. 처음에는 모델 일을 거부했지만, 모델이 되고 나서는 단지 포즈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완성해나가는지 관찰했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오늘날 마티스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된 것은 물론이다. 마티스는 직접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기를 좋아했고, 아내와 딸을 비롯해 수많은 모델을 세웠다. 작품에 모델 이름을 넣지 않았고, 어떤 작품이 리디아를 그린 것인지 기록이 불분명하기도 하지만, 리디아를 대상으로 9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고 드로잉과 스케치까지 더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리디아는 다른 모델들의 스케줄을 정리했고, 마티스의 작품을 판매하는 딜러들과의 협상을 중재했으며, 점차 건강을 잃어가는 그를 위해 작품의 뒷정리 등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안타깝게도 마티스의 아내와 딸은 리디아를 경계하고 해고하기도 했으며, 특히 마티스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녀를 내쫓았다. 그러나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수많은 작품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리디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녀는 자존심을 접고 존경하는 화가 마티스를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와 일을 마무리했다. 마티스가 죽기 전날, 그는 그녀를 앉혀놓고 마지막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1954년 마티스가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을 때, 1932년 22살의 나이로 그 집에 들어온 리디아도 40대가 되었다. 마티스는 자신에게 젊음을 바친 그녀를 위해 많은 작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리디아는 작품을 파는 대신 자신의 고국 생 페테스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기증했다. 자존심 있는 우아하고 똑똑한 여자의 대단한 선택이다. 핸드폰 케이스로도 인기를 끄는 마티스의 여인 초상화는 바로 이 위대한 여성 리디아를 그린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