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힘 때로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상징하는 색, 녹색은 그린 인테리어의 유행과 함께 성장과 원초적인 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이 시대의 컬러다.
영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미디어에 나섰을 때, 그녀는 그린 드레스에 터키석 브로치를 달았다.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 위기로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운 이 시기에 94세 원로 정치인의 탁월한 이미지 전략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터키석은 승리를, 그린은 안정과 위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 공간이 폐쇄되자 사람들이 찾아 나선 곳도 바로 녹지대로 가득한 공원이다. 인상주의 미술이 인기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생명의 근원인 푸른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실제 풍경이건 그림이건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에는 초록이 지닌 치유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 아를르에 내려가 예술가 공동체를 꿈꾸며 동료 작가 고갱과 불화를 일으켰던 시기에 유독 노란색을 많이 쓴 반면, 치료를 받고 난 후 아를르 및 오베르 쉬르와즈에서 그린 작품에는 유독 초록색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그린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로만 해석되지는 않았다. 그린은 곧 자연이라는 공식은 반대로 자연에 대한 공포심과도 연결되곤 했다. 만화나 영화에 등장하는 헐크, 슈렉, 프랑켄슈타인, 1980년대 공상과학 드라마 <브이(V)> 속 외계인이 모두 초록색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해자를 파고 성을 구축했던 중세의 건축, 물속에 사는 초록색 파충류나 녹조는 건물을 부식시키는 악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는 질투는 녹색 눈을 한 괴물이라는 대목이 등장할 정도다. 반면 ‘물’이 귀한 중동 이슬람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국기에 초록색이 등장한다. 모하메드는 녹색 터번을 둘렀고, <코란>에서는 낙원을 ‘짙은 초록으로 뒤덮인 곳’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라마단 종료일에는 초록 조명으로 도시를 장식한다. 이슬람이라는 말도 ‘평화롭게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중동 문화권에서 초록은 물이며, 생명이며, 평화를 상징한다. 문화적 차이보다는 글로벌 공동체의 협력이 더욱 강조되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 당분간은 그린에 대한 긍정적 의미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그린 인테리어는 미니멀리즘의 풍토에서 맥시멀리즘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만들어낸 중요한 변곡점이다. 전자파를 차단하기 위해 하나 둘씩 들이기 시작한 화분은 대형 선인장, 늘어뜨리는 박쥐란, 꼬마 다육이 화분 등 이국적인 인테리어 유행을 불러일으켰고, 준엄한 미니멀리즘에 억눌려 있던 장식 열망을 일깨웠다.
예술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단한 열기도 단지 그가 위대한 화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수영장(물), 꽃, 시골 풍경, 나아가 그랜드캐니언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한 수많은 자연의 이미지는 호크니의 대중적 성공과 깊이 연결돼 있다. 이제는 정돈된 자연에서 나아가 좀 더 원초적인 자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단색화의 열기 속에서도 20년 넘게 설악산에 칩거하며 야생화를 담아온 김종학의 그림이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며 세계 미술 시장에 어필하는 것도 하나의 방증이다. 신진 작가 만욱의 작품도 아프리카의 원초적 자연을 담아낸 앙리 루소를 연상시키며 마니아 층의 인기를 끌고 있다. 도시의 모노톤 대신 생명과 성장을 자극할 초록의 힘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