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의 시대를 비추는 거울 같은 미술.
부르스 광장과 물의 거울.
투명하게 반사하는 표면이 세련된 이미지를 갖게 된 건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벌어진 경쟁적인 항공우주 산업 덕분이다.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는 우주선과 우주인의 모습은 차가운 공업 기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어놓기 충분했다. 앤디 워홀은 우주인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을 뿐 아니라 반짝거리는 실버 소재의 헬륨 풍선을 갤러리에 띄어 공중을 부유하는 작품을 전시했다. 반짝거리고 반사하는 소재는 날이 갈수록 인기다. 제프 쿤스의 ‘토끼’, 시카고 도심의 마천루를 비추는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 수보드 굽타의 켜켜이 쌓인 스테인리스 그릇,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야요이 쿠사마의 거울의 방, 관객의 위치에 따라 흑백의 구분이 섞여버리는 올라푸 엘리아슨의 투명 유리구슬, 우주선 같은 이불의 작품, MIT 공대 연구원들과 협업한 토마스 사라세노의 공기 주입식 설치 작품 등 거리에서 만나는 건물, 공공 조각, 유명한 미술 작품은 하나같이 얼핏 보면 같은 작가의 것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우유니 사막은 이들 작품의 영감의 원천이다. 착시효과로 얻어지는 초현실적인 경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학에서 영감을 받은 미디어 아트라는 점이다. 첨단의 과학기술과 비현실적인 상상력이 실은 종이의 앞뒤 면처럼 나란히 붙어 있는 셈이다.
토마스 사라세노의 ‘궤도 속으로’.
앤디 워홀의 ‘은빛 구름’.
화가가 아니라 과학자나 의사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가 미소 덕분에 유명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눈꼬리 끝과 입꼬리 끝을 안개처럼 흐려버리는 스푸마토 기법은 인체를 해부하며 근육을 연구한 덕분에 나온 결과물이다. 작금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 가보지 않고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편집된 세계와 실재의 간극은 항상 존재한다. 박제된 동물에 유리구슬을 붙인 코헤이 나와의 작품은 바로 이 지점을 찌른다. 멀리 있는 것도, 아주 작은 것도 볼 수 있는 렌즈 덕분에 동물의 미세한 털까지 섬세하게 드러나지만 수백 개의 구슬은 전체적으로 그 사물을 가려버리고, 형태는 희미해진다. 동물 박제를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보지 않고 주문하는 시스템은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한 컨셉트 중 하나다. 제목에는 그래픽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 픽셀이 붙는다.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반짝거리는 것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일련의 현대미술이 드러내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학 이면에 가리워진 모호함의 세계다. 팬데믹 상황으로 전 세계가 마비되었지만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모일 수도 없고 모이지 않을 수도 없기에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기 바쁜데, 그들이 보는 세계는 알고 보면 편집된 이미지일 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면, 이 시대는 정답을 요구하고 흑백을 구분하려는 성향을 잠시 버리고, 모호함을 견디는 연습을 하게 만들고 있다. 작품을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현대미술 작품처럼 말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된 아니쉬 카푸어의 ‘큰 나무와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