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페이즈멍, 예측 대신 상상하는 기술
디지털 기술과 만난 데페이즈멍은 기존의 질서와 이성을 뛰어넘어 불가능한 현실을 꿈꾸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영화 속 사건 같다. 전염병과 홍수라니. 첨단의 2020년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헌데 마치 시간이 평행이동이라도 한 듯, 딱 100년 전 유럽이 이와 같았다. 기계 문명의 발전 덕분에 도시가 팽창하고 세계화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처절한 파괴를 경험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라는 유례없는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냈다. 이성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우연과 무의미의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건 바로 ‘데페이즈멍Depaysement’이다.
프랑스어 데페이즈멍은 본래의 자리(pays)에서 이탈(de-) 한다는 뜻인데, 시인 로트레아몽은 이를 ‘해부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즉 전혀 다른 문맥에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의아함, 기이함, 초현실적인 경험을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곡의 가사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같은 느낌이랄까. 의외의 결합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무의식을 해방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창조성을 발현케 한다. 이성을 갈고닦은 끝에 만나게 된 것이 결국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최첨단 무기와 자국 중심주의의 전쟁 논리였으니, 그것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꿈과 상상으로 달려간 것이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로 정교하게 그린 사물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작은 머리빗을 방 안 가득 차게 크게 그리는가 하면, 낮과 밤을 바꾸는 식으로시간을 바꾸거나 혹은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등 공간을 다르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데페이즈멍 기법은 1960년대 팝아트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이번엔 초현실주의 시대와는 다른 배경에서였다. 줄을 서서 물자를 배급 받고 절약하며 살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대량생산 시대에 접어들자 상품을 산처럼 쌓아놓은 슈퍼마켓 시대를 맞이했고, 그동안 살아온 상식이 완전히 깨져버리는 경험은 68혁명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작은 사물을 크게 만들어서 이번에는 아예 야외에 공공 조각으로 세워놓은 클라스 올든버그나 신체나 사물의 일부만을 크게 확장해서 화려한 색으로 그린 톰 웨셀만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요즘 다시 데페이즈멍이 부활하는 조짐이다. 특히나 디지털 미디어는 데페이즈멍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다. 사방이 이미지로 둘러싸여 총체적인 착시 효과에 빠지게 만드는 야요이 쿠사마의 작은 방, 디지털 아트의 새로운 영역을 펼쳐가고 있는 팀랩, 반 고흐 등 명작 프로젝션을 활용한 미디어 전시회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AR 기법까지 등장하여 카우스, 올라푸르 엘리아슨, 버질 아블로 등 미술과 패션을 오가는 첨단의 크리에이터들이 관람객이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해 작품을 구현할 수 있는 앱을 공개했다. 삼성역에 등장한 디스트릭트의 파도는 평면 전광판에 입체적인 효과를 구현해내 주목을 받았다. 기존의 질서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데페이즈멍을 활용하며 유머와 일탈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애써왔다. 데페이즈멍이 이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지금이 새로운 변화의 시기라는 징조는 아닐까? 수많은 미래학자들이 향방을 예측하고 있지만,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