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에 취한 영화

배경에 취한 영화

배경에 취한 영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최근에 본 <페인 앤 글로리>는 인테리어를 보는 재미가 있었던 영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최근에 본 <페인 앤 글로리>는 인테리어를 보는 재미가 있었던 영화다. 등장인물들이 입은 옷과 공간적인 배경을 보느라 대사를 놓치곤 했을 정도니까. 스페인 영화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려진 이 영화는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으로, 그는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의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말로 감독이 자신의 인생에서 큰 영향을 주었던 네 명을 한 명씩 만나고 회상하는 줄거리인데, 말로 감독의 집이 정말 멋지게 나온다. 하늘색 타일과 빨간색 가구를 매치한 주방도 파격적이고 피트 헤인 에이크의 테이블, 스메그의 돌체앤가바나 토스터, 까시나의 637 위트레흐트 암체어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어려운 디자인 가구가 집 안에 가득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공간이 실제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집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는 가구나 조명, 작품에도 관심이 많은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말로의 집 외에도 말로의 어린 시절 엄마가 꾸며준 동굴 집의 인테리어나 기차역, 미팅 장소 하나까지도 굉장히 공 들여 배경을 매만졌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영화다. 배경에 취하게 되지만 영화의 내용도 좋았다. 많은 찬사를 받은 영화인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영화를 보고 나면 제대로 잘 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마음에 남아 있던 것과 화해하고 인정을 하게 된 말로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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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패턴

10년의 패턴

10년의 패턴
패브릭 디자인 브랜드 키티버니포니에서 첫 책을 냈다.  

  밀러 블랙이라는 패브릭으로 감싼 <키티버니포니 패턴> 책을 들고 있으면 10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책에는 2008년부터 2020년까지의 패턴 하나하나가 만들어진 계기와 영감을 준 대상, 제작과 공정의 어려움,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 모든 패턴 사진이 실제 직물인가 만져보게 될 만큼 고화질 사진으로 담겨 있어 패브릭 샘플처럼 하나씩 넘기며 보는 맛도 있다. 키티버니포니의 대표이자 저자 김진진은 “매일의 물건, 소품 하나에 담긴 패턴이 주는 에너지가 당신의 일상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패턴은 키티버니포니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자 1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패턴 소개 외에도 소속 인터뷰와 직물과 패턴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도 담겨 있어 두고두고 펼쳐보게 될 것 같다.

tel 02-322-0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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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예술

걷는 예술

걷는 예술
요즘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작은 성취감일지도 모른다. 이미 걷기를 통해 예술을 완성한 이들도 있다.  
리차드 롱, 독일 클레베 미술관 전시. ⒸCC(Creative Commons)
 
리차드 롱, 포르투갈 Mario Sequeira 갤러리 ⒸGaleria Mario Sequeira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고민이 있을 때 일단 걸어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칸트가 시간을 맞춰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이 있는가 하면, 스티브 잡스는 산책 회의를 즐겼으며, 의사는 걷는 것만으로도 심장 혈관 운동이 가능하고, 뼈와 관절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실내에만 있을 수 없는 요즘이야말로 걷기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기회다. 리처드 롱 Richard Long(1945~)은 걷기를 통해 작품을 만든다. 대학 시절 그의 첫 작품은 숲속의 자주 걷는 땅 위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걷기의 예술은 5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걸어간 길의 흔적의 흔적(사진), 걸으면서 길에 남긴 흔적, 주운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재료 삼아 땅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더미 등이 작품이다. 동그랗게 또는 사각형으로 각을 맞춰 나란히 배열하는 일은 상당한 정성과 숨 고름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누구라도 해보았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생산과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누가 하릴없이 길을 걸으며 돌멩이를 줍는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품이 경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심지어 그는 8일 동안 240마일을 걸은 적도 있다. 그는 걷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을 만들 장소를 찾기 위해 걷지만, 결국 걷기가 작품을 만들 장소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풍광, 돌, 나무 뿌리 등은 애초 계획에 없었던 것들이지만 비로소 그것들로부터 예술이 시작된다.  
자코메티, 프랑스 매그 파운데이션 Ⓒ김영애
 
앤서니 곰리, 영국 크로스비 비치 Ⓒ김영애
 

  우연한 만남과 사건들이 삶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리처드 롱은 가서 보기 어려운 외진 곳에도 작품을 만든다. 아무도 볼 수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져버릴지 모를 조각이다. 아깝다고? 그러나 바로 이런 내려놓음이 그를 자유롭게 한다. 걸을 수 있는 한 예술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걷기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또한 살아 있는 한 걷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려 1천2백억원에 판매되어 화제를 모은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주는 감동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자코메티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장치를 하기도 했다. 나무 아래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은 고도의 심부름꾼이 남긴 메시지에 희망을 건 채 고도가 곧 올 거라는 희망으로, 고도가 대체 언제 올 거냐고, 만약 고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끝없는 만담을 펼친다. 코로나19가 대체 언제 끝이 날지, 백신 개발 소식을 되풀이하는 요즘 뉴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기다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유는 걷는 것이다. 앤서니 곰리가 바닷가에 심어놓은 조각, 도시의 빌딩 위에 심어놓은 조각은 당신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이다.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나를 보고 있고, 돌아보면 내 옆에 동료가 있다는 믿음이다. 고도가 올 때까지, 가을을 넘어 내년까지 걷기를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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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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