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를 디자이너라 부르고 혹자는 골몰히 상념에 젖어 있는 사상가라 평한다. 이토록 다양한 시선이 교차하지만, 그가 50여 년간 쌓아온 디자인 아카이브만큼은 올곧다.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필요와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이것이 엔조 마리가 오래도록 빚어온 디자인이다.
한국 시간으로 11월 19일, 그러니까 밤 11시가 까무룩 넘어갈 참이었다. 창간 기념호 마감이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 엔조 마리 Enzo Mari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0일, 그의 아내이자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큐레이터 겸 미술가였던 레아 베르지네 Lea Vergine마저 눈을 감았다. 엔조 마리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인 어워드인 황금 콤파스상을 다섯 차례나 수상한 이력을 지닌 것은 물론, 알레시, 아르떼미데, 아르텍, 카스텔리 등 유명 가구 브랜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디자이너다. 그리고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부르노 무나리 등 걸출한 디자이너와 동시대를 함께한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와 절규만이 가득했던 이탈리아의 근대 디자인을 쌓아올린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눈앞에서 친구가 쓰러지고 건물이 순식간에 부서지는 참혹함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그에게 큰 상흔으로 남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던 밀라노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은 공방에 취직한 수공업자들은 이제껏 정석과 규칙이라 생각했던 디자인적 요소를 모두 비껴간 제품을 생산했다.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풍부한 경험도 없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은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너무도 유용했다. 엔조 마리는 이런 모습을 보며 사용하는 이들을 가장 우선하는 것이 진정한 디자인의 첫 번째 요소라는 신념을 구축했다.
1974년, 그는 자급자족 디자인을 뜻하는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Autoprogettazione라는 신념의 정수와도 같은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도면과 판자, 각목 등 필요한 재료만 가지고 만들어 쓸 수 있도록 자신이 디자인한 세디아 체어 등 19가지 가구의 설계도면을 공개해 필요에 의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게 의도한 것이다. 포르모사 캘린더, 글로브 월 훅 등 일상과 밀접한 제품은 모두 이런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또한 그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값싼 강철 튜브를 활용한 델피나 체어와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몸체가 비스듬하게 제작된 쓰레기통 인 아테사 In Attesa 등은 화려한 기교가 없어도, 비싼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쓸모 있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날이 갈수록 새롭고 더 화려한 디자인만 좇는 지금, 엔조 마리는 여러 차례 경종을 울린 좋은 가이드가 될 듯하다. 많은 이가 그의 생각을 헤아리고, 그의 디자인을 사랑했다. 이제는 그가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