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공간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공간에 초대받은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소개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줄거리보다, 배우보다, 영상미가 잔상으로 남는 영화들이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광활한 자연도, 화려한 도시도 아닌 주로 집안 등 실내 장면이 많은데도 그렇다. 다시 말해, 인테리어에 눈길이 자꾸 가는 영화다. 최근작 <페인 앤 글로리 Pain and Glory(2019)>는 감독의 마드리드 집을 고스란히 옮겨 화제를 모았다. 수년간 호흡을 맞춰온 미술감독 앤트손 고메즈 Antxon Gomez는 알모도바르 감독이 소장해온 예술품과 가구를 공간 속에 적절히 배치했다. 심지어 주인공 역을 맡은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의상도 감독의 것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영화로 평가받는 영화 속 주인공의 직업 역시 영화감독이다. 그는 한때 성공한 영화감독이었지만 이제는 몸도 아프고 무기력한 노인이다.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 애증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주인공은 종종 빨간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주요 무대인 부엌도 빨간색이 주된색이라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빨간색과 화려함에 대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집이 박물관 같다”는 주인공의 옛 애인 대사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다. 감독은 지금까지 번 돈을 모두 컬렉션에 쏟아부었다고 말한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위해 소장 작품을 빌려달라는 전화도 오지만 거절한다. 빌랄타의 작품이 유일한 낙이며,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실제 스페인에서 알아주는 원로 작가이며, 감독과 오랜 인연이 있다고한다. 집 안 곳곳에는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한 채 외롭게 지내왔을 그를 위로하는 작품으로 가득하다. 생동감을 불어넣는 엔조 마리의 거대한 초록색 배 판화,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디자인한 빨간색 에클립스 램프, 유머를 더하는 포르나세티의 오브제와 나비 장식장, 화려함에 방점을 찍는 게리트 리트펠트의 오렌지색 소파와 에토레 소트사스의 알록달록한 조각품, 피트 헤인 에이크의 가구 등 작품 속 아트와 디자인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굴 주거지는 가난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뚫린 천장 위로 빛이 가득 들어오고 하얀 회벽으로 마감되어 마치 산토리니의 별장처럼 보일 정도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잠시 쉬어가는 벤치 장면조차 구멍난 양말을 꿰매는 등 그들의 빈곤함을 드러내지만 두 인물을 둘러싼 화려한 타일은 스페인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영화를 두세 번 다시봐도 좋은 이유는 매 장면마다 공간과 패션 등 보아야할 것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 안 곳곳을 어떻게 인테리어하면 좋을까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이 <페인 앤 글로리>라면 전작 <내가 사는 피부(2011)> 에서는 유명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우피치 미술관의 소장품 ‘우르비노의 비너스’,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 ‘오르겐 연주자,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가 주인공의 아트 컬렉션에 등장한다. 머리는 집 속에 있는데 몸만 밖으로 나와 있는 벽의 낙서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출세작을 연상시킨다.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유명 작품은 ‘이거 아는 작품인데’와 같은 반가움을 전해주는 반면,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반전을 거듭하는 줄거리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장기다. 신작 <더 휴먼 보이스>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