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이 함께한 전시는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승효상(이하 승) 7년 전, 서울 옥션에서 가구 전시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리빙, 다이닝 등 섹션을 구분해야 하는데, 여타 가구 페어처럼 칸막이로 구획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천을 활용해 구역을 나눴고 가구에 관한 설명을 썼다. 그때 천이 아니라 보자기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덕주 작가의 이전 전시의 큐레이션을 도와준 적도 있다 보니 다시금 전시 제안을 받았을때, 그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최덕주 작가의 조각보와 함께 전시를 꾸려야겠다 싶었다. 이번 전시는 그에 대한 결과다.
단단한 가구와 얇게 날리는 조각보. 얼핏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요소를 한데 모아놓고 보니 그 조화가 절묘하다. 승 대개의 조각보 전시는 그저 오브제처럼 벽면에 붙여 진열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아무래도 건축 설계를 하다 보니 조각보가 공간에 기여할 수 있는 힘을 고려하게 되더라. 그래서 이전에 생각했듯 조각보로 공간을 구획했다. 때로는 오브제처럼, 때로는 공간을 나누는 칸막이처럼 공간을 구획하다 보니 미처 보지 못한 조각보의 물성이 자연히 드러났다. 바람에 은은히 일렁이는 모습, 조각보 너머로 보이는 가구와의 묘한 조화를 보며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감을 발휘하다가도 때로는 주변과 합일되는 매력이 드러난다. 덕분에 더욱 특별한 전시가 완성됐다.
‘결구와 수직의 풍경’이라는 전시명도 인상적이다. 승 수직의 풍경은 말 그대로 손으로 짜서 만드는 풍경을 의미한다. 내게는 촘촘히 짜인 개개의 조각보가 마치 풍경처럼 보였다. 내가 만드는 가구는 결구로 이루어진 것이다. 각 부재와 부재를 연결시켜서 짜맞춰 구조를 만드는 게 결구다. 부재와 부재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구조를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재 중 어느 하나라도 그 균형이 무너지면 부서지고야 만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가구일지 몰라도 실은 투쟁의 산물인 셈이다. 내게는 결구와 수직이 지닌 본질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보와 가구 둘 다 만들기 전에 치밀한 계획이 필요한 작업을 거친다. 천과 천 사이를 잇는 바늘을 손으로 연결시키고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개개의 조각을 실로 꿴 조각보 또한 떨어지려는 힘과 이으려 하는 힘이 균형을 위해 투쟁한다. 가지고 있는 재료와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균형과 조화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오는 평화의 산물인 셈이다.
처음 조각보를 접했을 때는 회화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풍부한 질감과 색을 표현하기 위해 몇 번이고 덧대어 색을 입히듯 과정 하나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고로움이 느껴졌다. 최덕주(이하 최) 어렸을 적 할머니랑 같이 살았다. 옛 어른들은 당신들의 옷을 직접 지어 입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걸 직접 봐왔고, 그런 할머니의 작업이 너무 좋았다. 이후 직접 선생을 찾아 조각보 만드는 작업을 배웠다. 마흔 중반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이뤄지는 염색이나 감침질 같은 행위가 결코 단순하지 않더라. 염색 후 천이 숙성될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시간과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채워가는 인내가 응당 필요할 수밖에 없다.
마치 긴 레이스와 같은 작업처럼 보인다. 레이스는 길어질수록 처음의 마음가짐을 잊어선 안되지 않나. 어떤 자세로 작업에 임하는가? 최 검이불루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아야 하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매번 새긴다. 물론 당연히 만드는 과정에서 더뎌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도로 덮어놓는다. 이내 다른 작업을 진행하다 문득 다시 꺼내보면 더뎌졌던 이유가 정리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 같다. 최 서둘러서는 안 된다. 마음의 평정이 없으면 바늘땀이 굉장히 우스워진다. 나중에 보면 당시의 마음이 그대로 읽힌다. 불안했거나 번잡스러웠던 내면이 바늘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꽤 많이 작업을 진행했더라도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작업할 때는 늘 평정과 평안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곧고 올곧은 바늘이 나온다. 마음을 다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섬세함과 우직함이 공존해야 하는 정직한 작업이라고 할까(웃음).
천을 고르는 과정에서부터 굉장히 신중하다고 들었다. 최 주로 명주 비단천을 쓰는 편이다.여름에는 모시나 베도 종종 쓴다. 때로는 종류를 차치하고 정말 좋은 천을 마주할 때가있다. 전시에 걸려 있는 안동포처럼 구태여 염색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지닌 힘이 있는 천처럼 말이다. 소재 자체가 지닌 힘을 존중하는 편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조각보는 뛰어난 생활성이 돋보이는 물건이다 보니 활용도도 높은 편이다. 최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끈이 달린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혼사에 쓰이던 예단보를 활용한 것이다. 예물도 싸매도 되고, 지금처럼 장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공예는 생활과 공명하는 예술이다. 이불을 싸면 이불보가 되거나 옷을 싸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화려한 장식이나 수사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최 가장 좋은 디자인은 결국 단순함에서 오는것 같다. 다만 색에 있어서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편이다. 중요한 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좋은 방법은 자연에서 나는 재료를 활용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으면 어떤 색의 꽃도 모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듯이. 그런 것처럼 천연 염색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색을 함께 써도 튀지 않고 조화롭게 보이는 묘한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한 번 염색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이 따라 색이 꽤 날아가는데 이를 거치면 굉장히 편안한 채도의 색이 나온다. 색을 여러가지 섞더라도 편안함은 유지된다. 화이불치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단순함은 선택하고 버리는 작업을 수없이 거친 결과물이지 않나? 최 그렇다. 전통적인 한국의 미는 결국 절제하고 덜어내는 비움이다. 머릿 속에서 스케치를 하다 대략적인 구성이 완성되면 천을 다 꺼내본다. 그 중 필요없는 색을 제한다. 색을 고르는 과정 또한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여러 색 중에서 원하는 색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고르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필요한 색과 없는 색이 또 다시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있다. 그걸로 작업을 한다. 바느질 작업을 하다가도 계속해서 덜어낸다. 비우고 절제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만 좋은 조각보가 나올 수 있다. 승 시인 폴 발레리는 명료함만큼 신비로운 게 없다고 했다. 아주 간단하고 딱 부러지게 명료한 것이 가장 신비롭다는 말이다. 자신이 없을수록 말이 많아지고, 실력이 없을수록 선은 덧대어진다. 진정한 단순함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치열한 투쟁을 거치며 걷어내고 버리다 도무지 버릴 것이 없을 때의 상태다. 모든 것을 닦아내야 정수처럼 명료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상태다. 가구도 마찬가지다. 물론, 단순한 가구가 번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당혹스러움이 의문과 사유로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화려한 장식과 수사는 그럴 여지조차 쉬이 내주지 않는다. 건축 또한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 삶에 직결되는 문제이니만큼 선 하나로 삶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음을 무겁게 인지해야한다. 그 불안을 이고 최대한 고심해서 덜어내는 작업을거쳐야한다.
마치 도시와 건축을 분리해서 볼 수 없듯, 건축과 가구도 긴밀한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승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짓는다는 말이다. 건축이 단순할 수록 삶은 도드라진다. 그래서 건축은 단순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사는 이에 맞춘 건축이어야 하지, 건축에 사람을 맞춰선 안된다. 가구도 화려함을 입어버리면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행위가 가려진다. 그래서 가구도 단순해야 된다. 예전엔 지금처럼 기능에 따라 서재나 침실 등으로 공간을 구획하지 않았다. 이런 공간에는 그에 따른 목적을 위한 수사가 붙여진 가구가 놓일 수 밖에 없다. 장식이 화려한 가구는 그 자체의 조형미만 부각된다. 때문에 다른 요소와의 긴장과 조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공간이 사람의 삶과 조화로울 수 없듯 가구도 이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무게를 지탱하고 부재 간 조화가 있는, 그저 비워두고 기본적인 목적만을 지닌 가구가 좋은 가구이지 않을까.
전시의 부제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수도원의 가구라 이름 붙인 것처럼 수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구와도 일정 부분 닮아 있는듯 하다.승 수도원이라는 것은 물질과 육체, 정신도 버리고 항상 자신을 절박한 극한으로 몰아서 자기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게 만드는 곳이다. 수도사들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 심지어 내면의 욕망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 끊임없는 투쟁과 긴장의 상태가 이 가구와도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기능성에 많은 초점을 맞추는 요즘 가구와는 색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승 푹신한 등받이와 좌석이 없어 얼핏 불편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웃음). 편의와 효율, 기능이라는 것은 20세기 모더니즘이 창조해낸 용어라 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과연 기능적인 것이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때로는 불편함이 훨씬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염없이 자신을 편안한 상태로 두면 안주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된다. 조금은 불편해야 비로소 자기를 인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일말의 계기가 생긴다. 누군가가 이러한 이야기에 즐거운 불편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퍽 마음에 든다.
서양의 건축가들은 건축뿐 아니라 가구를 만드는 등 건축에 기반한 활동 반경이 굉장히 넓은 데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건축가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번 ‘이로재 프로젝트’는 무척 반갑고 신선했다. 승 서양 건축가들은 건축은 물론 도시 설계부터 가구 설계까지 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급격한 개발 때문에 건축물을 지어 올리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그래서는 안된다. 가구나 도시 등 우리가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없으면 결코 좋은 건축이 나올 수 없다. 내가 설계한 공간에는 항상 그에 맞는 가구를 디자인하고 어울리는 장소가 있거나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늘 두었다. 원하지 않아도 계속 권유했다. 사실 이번 전시는 내가 만든 가구를 소개하는 자리만은 아니다. 지금 건축가들에게 본래의 직능에 대해 일깨워주고 싶었다. 주어진 것만 설계하지 말고 생각의 범위를 확장해서 넓히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선동을 하는 거다(웃음).
전시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승 건축가들의 걸작이 만들어지는 때가 딱 내 나이대다.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이 있어야 좋은 건축이 나오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더 잘 할 수 있는 게 건축이라고들 하니 말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건축을 하는 게 목표다. 최 사실 내 작업은 누구에게 내보이려는 것은 아니다.작업을 통해 나의 평안과 안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지금도 마음은 한결같다. 특별한 계획 대신 그저 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해나가지 않을까. 치열하게.
다음 전시에 대한 기대를 가져도 될까. 승 · 최 반응이 좋다면야 가능하지 않겠나(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