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회화과 출신으로 조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부 시절,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전공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음악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전자기타를 주로 연주하며 인디 밴드 활동을 했는데, 그 역시 어느 시점이 되니 지루해졌다. 록 음악보다는 악기 자체에 관심이 생겼고 전자 기타나 앰프, 이펙터 등 소리를 내기 위한 장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킷 밴딩이라고 회로를 의도적으로 고장 내서 노이즈를 만드는 기술도 접했는데, 노이즈 음악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소리라는 것을 물질 다루듯 했기 때문이었다. 음악이라니, 뜻밖의 답이다. 그렇게 학부 때는 그림보다 밴드 활동을 했고, 어느 순간 멤버들도 교체되면서 열정이 희미해졌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친구들을 따라 도피하듯 조형대학원에 진학했고, 첫 학기 수업 때 조각가 선생님을 만났다. 대학 때는 미술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해온 음악과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보여주면서 크리틱을 받았다.
조각과 음악 간에 연결된 부분이 있는가?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할 때 사용한 사물을 당시 선생님께서 보시고는 “너는 지금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것을 사용하고 있고, 그러면 사물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다”며 물질을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내게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사물의 언어는 무엇일까, 조형의 언어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며 자연스럽게 조각을 시작했다.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아온 다른 조각가와 달리 음악을 조각적인 방법으로 푸는 것에서부터 작업이 출발했다.
신예 작가로 이번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은 특별했을 것이다. 작년에 연 첫 번째 개인전을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께서 보고 나서 이번 전시를 제안했다. 내게는 놀라운 제안이었고 활동한 경력이 짧은 신인 작가가 이렇게 큰 공간에서 전시를 할 수 있다는게 설레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주변의 도움과 지원으로 무리 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독특한 형태와 생경한 컬러감이 돋보인다. 도시 풍경의 현재와 미래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들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 예술적인 키워드를 이야기하자면 ‘축경’이라 할 수 있다. 축경이라는 것이 수석과 분재처럼 동양의 원예 문화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 처음에 우연한 계기로 SNS에서 수석을 수집한 이미지를 보면서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후 수석에 대해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경이란 커다란 풍경을 축소해 방 안이나 뜰에서 감상할 수 있는 형태를 뜻한다. 내게는 풍경을 축소하는 방식이 실재하는 풍경을 고스란히 작게 재연하거나 상상하는 풍경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서 물질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그 자체에서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은 풍경으로 제시한다는 점과 수석이라는 돌덩이를 보면서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이 새로웠다. 실제로 작은 돌멩이일 뿐인데 큰 산이나 구름, 바다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작업에 기반이 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어떻게 작품에 녹여냈나?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축경의 방식으로 건축한다면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축경은 돌이 놓여 있는 풍경에서 비바람에 의해 풍화되고 침식되고 깎이며 변화한다. 돌 자체를 구성하는 재질과 성분 역시 산에 있으면 그 산에 있는 재질로, 바다에 있다면 그 바다에 있는 재질로 변화하며 풍경과 동일한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이처럼 기후나 지역, 지리적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있듯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풍경을 만들고 싶다면 가장 보편적인 재료를 구해야겠다 싶었다.
가장 보편적인 재료라 하면? 폴리스티렌과 에폭시, 시멘트다. 이는 오늘날 건축 내장재라든지 바닥 표면을 코팅하는 데 쓰이는데, 예를 들면 피하조직이나 표피에 해당되는 재료다. 이것들을 사용할 때는 재료가 지닌 물성을 염두에 두기보다 값싸고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뤄서는 재료가 지닌 고유의 성질과 형태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했고, 이런저런 실험을 거치면서 특정 조건에서 녹거나 과열되고 깨지거나 부풀어오르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료가 지닌 물성을 통해 조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축경이라는 것을 다룰 수 있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축경 자체가 물질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고,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만큼이나 전시명도 독특하다.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폴리스티렌에 굴을 파고 빈 부분에 다양한 색깔로 조색된 에폭시를 붓고 폴리스티렌을 녹이면서 작업한다. 에폭시라는 재료가 조색되었을 때 컬러풀하고 형형색색의 재료가 굴 속으로 들어가며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마치 무지개 같았다. 무지개는 투명하고 만질 수 없으며 과학적이고 신기루 같은 성질이 있는데, 내가 느끼는 오늘날의 세계도 무지개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무지개가 마법 같고, 비물질적이고 광학적이라면 굴을 판다는 것은 육체적인 행위다. 나에게는 조각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한데, 이 두 가지 이미지 간의 대립이 흥미롭기도 하면서 내가 조각을 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조각 하면 자연스레 무채색이 떠오른다. 조각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밝고 채도가 높은 색상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 이유와 함께 그런 선택을 하는 데 기준이 있었나? 색깔은 평소 많이 보는 문화와 대상에서 가지고 온다. 애니메이션이라든지 게임, 라이브스트리밍 등 인터넷으로 접한 문화산업에서 만들어낸 색에서 선택하고, 그것들이 인스턴트하고 자극적이고 너무 유치하고 유아적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유해하고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막상 작업하는 동안 굴 안에 재료를 녹이는 과정을 거치면, 변색도 많이 일어나고 표면에 얼룩도 생기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라고 부패해 썩는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시점 중 하나다.
신작 ‘아토그 Atog’에 대해 설명해달라. ‘아토그’는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조각 시리즈 중 ‘아키텍톤’이라는 조각 시리즈를 모티프로 작업한 것이다. 사실 조각이라는 게 인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풍경이 대상이 된 적이 많지 않다. 그래서 미술사를 찾아보면서 풍경을 조각으로 표현한 작가가 있나 찾아보는 과정에서 말레비치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레비치 역시 풍경보다는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 당시 유토피아적이고 미래적인 도시, 모더니즘 시기의 기하학적인 도시를 작은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 조각을 보면서 작은 조각이 커다란 풍경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축경의 감각과 유사해 보였고, 말레비치의 작업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건축물을 작은 스케일로 줄이듯 높게 쌓은 형태가 독특하다. 작업 방식은 어떻게 이뤄지나? 말레비치의 아키텍톤 시리즈 중 ‘고타 Gota’라는 작업이 있는데, ‘고타’는 도시 건축에서 수직적인 것을 의미한다. 말레비치의 경우 석고로 만든 입방체를 블록처럼 쌓아 작업했다면, ‘아토그’는 폴리스티렌을 입방체로 쌓아 올리되 양적인 덩어리가 아닌 굴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고, 그 구덩이에 에폭시를 비롯한 재료를 타도해서 네거티브 공간을 떠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말레비치와 다르게 텅 빈 부분이 덩어리가 되고 작업할 때에는 뒤집어서 재료를 붓고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다시 뒤집는 방식이 흥미를 끌었고, 작품 이름 역시 거꾸로 ‘고타’에서 ‘아토그’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든 예술 행위는 직접 만들어내는 집념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굴을 파내 재료를 붓고 그 재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형태로 제작하다 보니 예측하기 어렵고,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또 유해하고 유독한 재료를 다루다 보니 공간적인 제한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다.
다음 프로젝트나 앞으로 전시 계획이 궁금하다. 단체전과 2인전이 올해와 내년에 잡혀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 조각 작품이 많았다. 재료는 비슷하지만 형태가 다양해졌는데, 전시를 준비하면서 재미있는 요소를 더러 발견했다. 이런 요소를 풀어가면서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지 않을까 싶다.
현남 작가의 개인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는 10월 3일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된다.web www.nend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