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진우와 김택상 작가의 작품 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진우 작가와 김택상 작가는 많은 공통점이 있어 흥미롭다. 반복과 수행의 작업으로 마음을 단련하는 단색화와 연결되었다는 점, 한 가지 주제의 연작에 오랜 시간 천착하고 있다는 점, 지금 각자 한국에서 올해의 마지막 개인전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두 사람은 몇 년전 리안갤러리 그룹 전시에서 처음 만난 이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김택상은 이진우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고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정성을 다하는 미술가라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마치 무술 수련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아니라 몸을 들인 만큼 작품의 경지가 달라지는 거지요. 작가가 온몸으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전신까지 성숙해질 것이며, 이것은 조선의 선비 문화에서 유래된 태도입니다.” 이진우는 김택상 작가의 작품을 보고 그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그 자체가 벽이 되어 관람객이 부딪히게 되는데, 김택상의 그림은 쓱 스며들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스며드는 것입니다. 무수한 반복의 노동과 헌신을 통해 내가 비워지고 낮아져서 화면 속에서 작가가 사라지면, 빈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거니는 것처럼 작품 속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이진우 작가는 이것이 일종의 힐링이라고 설명한다. 관람객이 아무도 없는 곳을 거닐면서 본래 자아와 만나 존엄성을 갖게 되는 접점을 찾길 기원하며 작업한다.
두 작가는 추사 김정희, 겸제 정선과 같은 수묵 거장의 후손으로 서로의 작업을 이해하고 존경하기에 포스트 단색화 작가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김택상은 서양미술가의 작품은 화면에 색칠을 해서 빛을 반사시키지만, 자신과 이진우 작가의 작품은 수묵화와 마찬가지로 빛과 색을 담는다고 말한다. 서구 미술가는 캔버스 표면에 색칠을 하지만, 두 작가는 숨 쉬는 피부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 색과 빛을 담는다. 이렇듯 서구 작가와 재료를 다루는 방법과 정신이 다른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를 우리는 ‘단색화’라고 부른다. 서구 작가들은 스토리를 중요시하지만 이우환, 하종현, 박서보, 정창섭, 윤형근과 같은 선배 작가들은 자신의 정신을 담은 그림을 그린다. 어느 것이 우월한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수십 년간 각자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이 어느 날 서로의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단색화였다는 것. 김택상과 이진우 작가도 서로의 작업에 매료되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두 작가가 한 가지 소재의 연작에 수십 년간 매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깊다. 김택상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캔버스를 아크릴물감 물에 담그고 말리는 지난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리는 이 작업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로 미술 애호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계속 같은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얼마 전 대학에서 조기 퇴직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졌기에 실험을 많이 하고 있지요. 작업 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고 더 과감하고 자유로워졌어요.” 작가 자신의 감정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간의 변모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김택상 작가 본연의 성향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진우 작가 역시 1990년대부터 숯을 뿌리고 한지로 덮어 지우는 과정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두 작가 모두 30여 년의 세월 동안 하나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진우 작가는 변하지 않으려고 매일 노력한다고 말한다. “작가로서의 삶은 고통과 아픔입니다. 같은 일을 수십 년하면서 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돌로 심장을 긁는 것처럼 아프고 힘듭니다. 이러한 삶이 허무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매일 작업하다 보니 이 심심한 일이 재미있어졌고, 의도치 않았지만 조금씩 달라집니다. 인간은 동일한 속도로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기 때문에 나와 작품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요.” 두 작가의 큰 차이점이라면 이진우 작가는 1984년부터 파리에서 작업하는 중이라는 것인데, 작품을 보아서는 이를 느낄 수 없다. 이진우 작가가 오히려 파리에 가서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한국인으로서의 중심 찾기에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박서보와 절친하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김 택상 작가는 대학생 시절부터 박서보 작가의 따뜻한 조언을 받아왔지만 젊은 혈기의 반항심을 가진 적도 있다고 했다. 이진우는 2016년 파리를 찾은 박서보 작가가 호텔에 걸린 그의 그림을 보고 ‘100%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 호평하면서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박서보 작가는 김택상, 이진우 작가 의 선배를 자청하며 두 사람을 적극 격려하고 있으니, 무척이나 아름다운 인연이다. 구순의 박서보 작가가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후배 작가로 분발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MZ 세대까지 가세한 미술 컬렉션 붐이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것에 대한 두 작가의 생각도 일맥상통하다. 미술계의 호황을 긍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양면성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미술 작품을 투자 가치로 보기보다 TV보다 작품을 벽에 걸면 아이들의 인성 교육에도 좋으니 적극 검토할 것을 권한다. ‘그림’의 어원은 ‘그리워하다’라고 한다. 이 말처럼 가슴의 울림이 있는 작품을 집에 걸면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젊은 나이에 미술을 포기하는 후배 작가들에 대한 아쉬움, 감상보다 투자를 우선시하는 우리나라 풍토에 대한 고민도 깊다. “예술은 인간 위에 군림하거나 인간보다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작업의 도구이기에 내가 그림 뒤로 사라지고 양도되어가는 것을 실현해보고자 합니다.” 이진우 작가는 붓을 들 힘이 없을 때까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할 생각이다. “우리 같은 작가는 세계 최고의 미술가가 될 욕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작가가 되어 자기다움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요.” 김택상 작가는 어떤 스타일이 아니라 그저 작가 자신으로 살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두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미술계의 미래를 읽을 수 있어 기쁘다. 2022년, 새롭게 만나게 될 김택상, 이진우 작가의 건투를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