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처음부터 경계란 없었다는 듯 제품과 조형, 건축 그리고 그 너머의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오메르 아벨은 예술을 하나의 명제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디자이너다. 그저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것을 만드는 행위, 이것이 그가 말하는 예술이다.
오메르 아벨.
종이같은 질감을 구현한 조명 73V.
조명이 매력적인 이유는 제품이 지닌 멋 그리고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낸 유려한 장관을 함께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캐나다를 대표하는 브랜드 보치는 조명이 지닌 미적 특징을 극대화해 마치 조형 작품 같은 제품을 선보여왔다. 보치의 조명이 설치된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근사한 설치 전시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대담하고 경이롭기까지한 조명을 만든 이를 보게 되면 독특한 매력을 더욱 체감할 수 있다. 브랜드의 설립자이자 디자이너 오메르 아벨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디자이너로 불리기 때문. 디자이너지만 캐나다 국가대표 펜싱 선수로 활동하다 지금은 건축가로 활동하는 등 변화를 서슴지 않는다. 다만, 디자인에서만큼은 명확한 가치관이 드러난다. 독창적이고 새로울 것. 자신의 결과물에 믿음을 가질 것. 구리나 유리를 주로 사용하는 그는 재료에 대한 특질을 명확히 이해한 뒤 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나 세공 방식으로 디자인을 실현시킨다. 자신이 디자인한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해 이를 제품명으로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여러 수식어 대신 번호만을 사용하는 것만 봐도 아벨이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마저 느껴진다. 2005년 선보였던 조명 14는 블로잉 기법과 세련된 세공을 거친 유리 구 안에 LED 램프를 넣은 것인데, 모듈식으로 생산되어 공간에 따라 30개가량까지 이어 설치할 수 있다. 2015년 메종&오브제에서 선보인 73은 강한 내열성을 지닌 패브릭 속에 유리를 녹여 만드는 독특한 방식을 활용했는데, 텍스타일 특유의 질감이 구현되어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을 보면 마치 구름 같다. 그런가 하면, 2017년에 발표한 87 시리즈는 구리 소재의 그물망에 유리를 부어 형태를 잡았는데, 숙련된 전문가조차 난항을 겪을 만큼 고도의 기술이 도입되어야만 제작이 가능했다.
구리와 메시 소재로 만든 유리 화병 84.2.
최근 작품 또한 결을 같이한다. 202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최신작 100은 여러 유리공예가를 섭외해 각자의 노하우를 담은 여러 유리를 사용해 독특한 물성을 지닌 조명을 제작했다. 흥미로운 건 제품을 디자인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기지만, 제품의 출시 순서까지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제품을 실체화함에 있어 이미 상용화된 기술이나 공예 기법 대신 늘상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천차만별이기 때문. 나무를 닮은 16 시리즈의 경우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나 나올 법한 미래적인 디자인이 흥미로운데, 기술력이 마땅치 않아 1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출시됐다. 아직 선보이지 않은 번호의 제품이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공개될지 기대가 된다. 넘치는 실험정신을 표출하기 위해 OAO WORK라는 또 다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는 점도 놀랍다. 평소 재료나 물건 등에 대한 아이디어나 호기심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풀어낸 제품을 선보이는 곳으로, 글라스나 다양한 오브제 작품을 본다면 여전히 오메르 아벨의 머릿속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이토록 흥미로운 변칙이라면 불확신 대신 기대와 설렘으로 오메르 아벨의 다음을 기다리지 않을까. 언제 또 그가 어떤 방식과 디자인으로 새로움을 구현해낼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76조명이 설치된 모습. 수많은 조명과 빛이 공간을 압도한다.
2021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100.
형형색색의 유리 구가 매력적인 조명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