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외관이 돋보이는 이영순 작가의 작품은 들여다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하나 하나의 종이 심이 정교하게 엮여 있는 것을 보면 형태를 완성하기까지 들인 노고와 세심한 기술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스페인 기반의 패션 하우스 로에베는 매년 유구한 예술과 그에 기반한 작가의 기술과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170여 년이라는 묵직한 브랜드 역사의 명맥이 소재를 이해하고 다루는 장인 정신에 있다고 여기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이 생활과 미학을 아우르는 예술인 공예의 가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2016년부터 시행해 온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즈는 비록 그 기간은 짧지만, 국적을 불문하고 2500여 점이 출품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장인의 손에서 정교하고도 섬세한 결과물을 조명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2019년이 유독 뜻 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수한 예술의 갈래가 한데 모이는 이곳에서 4명의 한국 작가가 29인의 최종 후보자로 당당히 자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각각의 한지를 정교히 꼬아 하나의 심을 만들고, 각각의 심을 다시 서로 엮어 만든 항아리를 차곡히 쌓아 구성한 세 개의 기둥 형태의 코쿤 시리즈는 당시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무엇보다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했다. 꼬임 하나하나의 섬세함이 합쳐져 구현된 이 아름다운 예술품은 바로 지승공예가 이영순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2019년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즈에서 선보인 코쿤 시리즈 기둥을 오마주한 형태 사이에 서 있는 이영순 작가. 회색, 먹색, 흑색 등 채도가 다양한 항아리가 차곡히 쌓여 있는 모습이 미학적이다.
이영순 작가의 작업실은 마치 그의 작품 아카이브를 보는 듯 방대한 작업물을 만나볼 수 있으며, 40년간 머물면서 오롯이 작업에 임해온 작가의 우직함마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승 공예는 종이를 사용하는 지 공예의 한 갈래다. 지승이라 함은 종이를 의미하는 ‘지’에 노라는 뜻의 ‘승’을 합한 단어로, 종이 노끈을 의미한다. 한지를 비비고 꼬아 심을 만든 다음 형태를 구상해 짜는 과정으로 완성하는 수고로움의 영역이다. 작가를 만나기 위해 찾은 대신동의 주택은 그녀의 작업실로도 불릴 만했다. 마치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곳에 총망라 해놓은 듯한 착각이 절로 날 만큼 지승 작품을 비롯해 지공예의 여러 분야를 두루 다루는 그의 무수한 결과물을 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선반을 채운 지승 공예품은 물론, 실이나 천을 보관하기 위해 선조들이 사용했던 실첩 실상자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 등을 보면 과하게 화려하지 않더라도 검소함에서 오는 정갈한 운치와 놀랍도록 정교한 완성도에 노고로 구현해낸 예술성이 느껴진다. “지하와 1층은 나와 바깥양반이 같이 작업실로 사용해. 나야 뭐 좋지. 작업하는 곳이 멀리 있으면 그것 만큼 또 번거로운 게 없잖아. 예전에는 꽤 휑해 보였는데 여기 머문 지 40년이나 되다 보니 어느새 차버렸어.” 작가의 말처럼 작업실은 그의 손에서 일궈진 공예 작품과 작가 부부가 머문 시간을 증명하는 듯한 여러 수집품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옛것 같은 새것, 새것 같은 예것> 전시장 모습. 여러 개의 지승 작품이 한데 모인 인스톨레이션은 개개의 작품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얼핏 표주박처럼 보이기도 한 작품 ‘레인보우 레이디’. 붉은 실로 천장에 매달린 이 작품은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설명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수십개의 서적은 이영순 작가가 걸어 온 길을 증명하는 무언의 흔적이다. 지공예는 도자, 목기, 유기, 칠보 등 여타 공예 장르에 비해 기술의 보급과 전수가 유독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작품은 남아있음에도, 만드는 이와 방식에 대한 전승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영순 작가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하기 시작한 1970 년대 초반, 여러 골동품 가게와 미술관을 전전하거나 야사 등의 역사적 기록 혹은 예용해 선생이 편찬한 인간 문화재 등 여러 서적에서 그 흔적을 일일이 찾아왔다. 때로는 수소문을 통해 몇 없는 장인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고 작가는 회상하듯 전했다. 그 결과, 작가가 잇고 있는 종이 공예의 명맥이 작업실에 현존해 있다. 당연히 지금까지도 종이를 향한 작가의 애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종이는 무궁무진해. 뭐든지 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도 될 수 있어. 기능적으로도 활용도가 뛰어나고. 염색이나 직조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화학 재료 때문에 건강에 무리가 가거든. 화학 제품을 쓰다 보니 공간의 제약도 있는 편이지. 근데, 종이는 가볍고 어디서고 아무 때나 찢어서 쓸 수도, 붙일 수 있고 배배 꼬아도 되는 대단히 좋은 공예적 재료란 말이지. 이게 또 하나 하나로 볼 땐 이렇게 약할 수 가 없다만, 합치고 꼬면 지천년 견오백이라고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이라는 말 마따나 탄탄해지기까지 하잖아.”
그는 지공예 분야의 전반적인 작업을 진행한다. 한지로 만든 상자는 장신구나 실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던 작품인데, 고서나 박물관에서 발견한 유물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작품의 역사적 가치와 작가 개인의 역량까지 고스란히 살린 점이 멋스럽다.
실이나 비단을 보관할 수 있는 실첩 실상자.
물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시간과 수고로움이 필히 덧대어져야만 한다. 형태가 아무리 조그마할지라도 소요되는 시간이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 크기에 따라 한 두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꼬박 할애하기도. 하나의 심을 만들기 위해 고서의 파본이나 오래된 한지를 일일이 비비는 끈처럼 만드는 기초 작업이 우선 되어야 할뿐 아니라, 이를 하나의 형태로 엮어내는 수고로움과 인내는 반드시 수반되는 요소다. 재료를 점점 더 구하기 힘들어진다는 점 또한 계속해서 당도해야 하는 해결 과제다. 요즘의 한지는 모조지를 섞어 만드는지라, 심을 만들 경우 더러 끊어지기 일쑤다. 재배가 쉽지만 얇게 자라는 동남아 지역의 닥나무를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 이에 옛 한지를 사용한 오래된 서적의 파본 등을 사용하나, 가격이 비쌀 뿐더러 수량의 문제 등 여러모로 공수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이영순 작가는 이를 너끈히 수용하며 지승 공예를 스스로 감내하는 예술이라 말한다. “계속 손가락을 비비다 보니 지문도 닳아 없어지고 뼈도 이리저리 휘었지. 그런데 몸은 쓰라고 있는 거잖아. 조급해하면 얼기설기 엮여서 못생겨져. 세월아 네월아 하는 담담함이 필요해. 시간에 얽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시선을 내리자 보이는 그녀의 손은 그 말처럼 담담하게 작품을 향해 쏟아온 영광스런 흔적이 여실했다.
작업실 벽면에는 리넨과 모시, 펄프로 만든 작품 ‘일상의 매듭’이 걸려 있다. 지공예의 현대화를 위해 고심하는 작가의노력을 엿 볼 수 있다.
여러 크기와 용도의 지승 공예품을 만드는 작가의 작업물. 아무리 작아도 최소 일주일에서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저 감내 하며 작품을 만든다.
그녀는 단순히 흐렸던 전통의 명맥을 잇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에도 지승 공예의 가치가 유효할 수 있음을 보이는 데 주력한다. 2014년 서울시립 남서울 생활 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 <옛것 같은 새것, 새것 같은 옛것>에서는 전통적인 지승 공예 제품인 코쿤 시리즈나 모시 광주리, 표주박 형태의 작품을 공개한 동시에 의자나 옷걸이, 새장 등 철사 등으로 형태를 잡은 현대 생활품에 지승을 휘감아 현대적인 요소와 전통의 결합을 선보였다. 특히 해당 전시에서는 작품 개개의 완성도에 주목 한 것은 물론, 여러 지승작품을 한데 모아 이룰 수 있는 인스톨레이션을 선보여 그야말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예술의 장 또한 선보였다.
여러 크기와 용도의 지승공예품을 만드는 작가의 작업물. 아무리 작아도 최소 일주일에서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저 감내 하며 작품을 만든다.
지승에 사용되고 남은 재료로 평면화 작업에 도전해 현대미술과 전통 공예의 결합을 꾀한 과감한 작업 또한 시도한 바 있다. 나아가 이영순 작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지승 공예의 미학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프로젝트도 병행하는 중이다. 올해 6월 열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공개될 로에베 크래프트 전람회에 메인 작가로 참가하며 인연을 이어가는 한편, 같은 해에 개최될 뉴욕 아트 페어나 미국의 유명 백화점 보그도프 굿맨에서도 곧 그녀의 작품이 비치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장 전통적인 것이 이제는 가장 현대적인 것 일 수 있음을 지금 이영순 작가의 공예품이 직접 증명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잊혀져 가는 전통 예술에 불어넣은 일말의 숨이 훗날에도 그 어떤 빛바램 없이 고스란히 이어나가고 있음을 믿는다. “현대에 사는 사람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건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의 의무와 책임이야. 한번 없어지면 다시 생명력을 찾기 힘든 일이니까. 비단 종이 공예가 아니더라도 나같은 사람이 어떤 영역이든 간에 또 하나쯤은 있을거야. 이 사람들이 하는 노력이 부디 저 먼 날에도 잘 닿기를 바랄 뿐이지”라고 전하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