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경 작가의 작업실에는 그녀의 초기 작업인 비누를 깎아 만든 인체 조각상부터 설명 없이는 실제 유리 화병으로 착각하리만큼 투명한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낸 고스트 시리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작품이 가득하다.
영국 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히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미경 작가.
누군가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토록 향기로운 공간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로움에 한번, 눈앞 에 펼쳐진 방대한 작업물에 또 한번 놀랐다. 셀 수 없을 만큼 많 은 양의 작품만 봐도 오랜 연륜과 그 노련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신미경 작가의 작업실이다. 영국 런던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마침 국내 전시를 위해 귀국한 틈을 타 인터뷰를 요청했다. 서울대 조소과 석사를 졸업하고 1998년, 런던으로 넘어가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굵직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그녀에게 조각가로 활동하게 된 시작점을 물었다. “한국에서는 나무를 깎아 만드는 목조 작업과 레진으로 한 작품을 주로 만들었어요. 때문에 런던에 가서도 연결성을 위해 레진 작업을 이어 가려 했는데, 마침 제가 다닌 런던 슬레이드 스쿨에서는 레진을 금지했더라고요. 이 재료가 굉장히 독성이 있기도 하거니와 냄새가 심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했던 거죠.” 그녀는 문화적인 충돌 속에서 새로운 컨셉트와 재료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젊은 작가들이 보통 전통적인 것을 기피하고 기존의 것을 완전히 뒤엎는 시도를 하고자 하는 반면, 그녀는 꼭 그 방법만이 새로운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 것.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죠. 처음에는 왁스로 인체상을 만들고 그 안에 액체를 부어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듯한 작업을 했어요. 왁스의 경우 녹으면 자취가 없어져요. 왁스나 비누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없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들 그리고 그것이 대조를 이루고 역설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어요.” 그 당시는 개념미술이 우세할 때라서 과거의 미술이 터부시되곤 했는데, 작가는 이에 의문을 가졌고 그것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제가 보여준 고전 조각이 언젠가는 동시대성을 가졌던 것이었을 테고,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미경 작가는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를 우연찮게 화장실에서 발견했다. 조그마한 핑크색 비누가 마치 대리석처럼 느껴졌고, 비누를 조각해보기로 결심한 것.
신미경 작가의 작업실에는 그녀의 초기 작업인 비누를 깎아 만든 인체 조각상부터 설명 없이는 실제 유리 화병으로 착각하리만큼 투명한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낸 고스트 시리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작품이 가득하다.
정교하게 깎아낸 비누 조각상 위로 색이나 광택, 브론즈를 입혀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듯한 효과를 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미술 수업 때 빨랫비누를 조각해봤어요. 그때 빨랫비누를 깎았던 기억이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때문에 제게 조각의 원초는 비누라 할 수 있죠.” 우리 모두 삶이 다르고 각자 놓인 환경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비슷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이상했던 그녀는 스스로에게 시차와 낙차가 없는 작업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전 조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작업 방식을 택한 것. 사실 비누를 깎아본 경험이라고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전부이거니와 비누의 성질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숫비누를 갈아 그 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해 찰흙처럼 만들어 붙이고 그것이 마르고 나면 마치 돌을 깎아내 듯 표면을 깎는 과정을 거쳤다. “맨 처음 만들고 싶었던 것이 로뎅의 ‘더 키스’ 조각이었어요. 왜 그랬냐면, 로뎅의 ‘더 키스’ 조각이 북프랑스에서 남쪽 국의 도시에 기증되었는데, 당시 너무 외설적이라 대중화될 수 없다는 판단에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되었어요. 지금은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원래 기증했던 시청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쉬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2000년 도시에서 열리는 조각 페스티벌을 위해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잠시 이 작품을 빌려주게 돼요. 하나의 작품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벌어진거죠. 우연히 제가 이 스토리를 듣게 되었고, 만약 실사 크기의 ‘더 키스’ 작품을 복제하듯 똑같이 비누로 조각한다면 진품을 대체할 수 있는 작품이 생기는 게 아닐까 했어요. 마치 사람의 몸에서 유령이 빠져나오듯 말이에요.” 조금은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이를 도울 여건만 충족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거대한 덩어리 비누를 구하기 위해 비누 회사에 편지를 썼고,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예시가 필요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작품부터 실제 사람 크기의 인체 조각상까지 사이즈는 물론 색상과 패턴까지 조각가로서 활동한 지 20년이라는 긴 세월만큼 폭넓은 작품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이를 위해 물로 여러 개의 비누를 쌓아 올리고 깎는 과정에서 비누가 물에 반죽되면서 끈적하게 변했고, 비누가 찰흙의 성질과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빚거나 덧붙여 만드는 소조 방식을 채택하고, 사이즈도 무한대로 커지고 부분 부분 색상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6년간 조각상 작업을 이어오다 더욱 발전된 캐스팅 기법을 활용하게 되었고, 그때 ‘토일렛 프로젝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의 조각을 만 들기 위해 2000개의 조그마한 비누를 갈고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는데, 캐스팅 기법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수십 개를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어 그 가치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화장실로 보내 닳아 없어지게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죠.” 작가가 만든 비누 조각상은 화장실에서 장식적인 역할로 소모되기도, 사람들이 실제 비누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작가가 51%를 완성하면 작품 스스로가 49%를 채우면서 완성되는, 작품 스스로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과정에 집중했다. 이후 한발 더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우연히 들른 박물관의 페르시안 유리 섹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고스트 시리즈’다. “하나에 몇 십억을 호가하는 이 유물을 비누로 만든다면 엄청난 대조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설명 없이는 실제 유리라고 착각할 만큼 얇은 투명성을 자랑하는 ‘고스트 시리즈’는 투명 비누를 틀에 부어 깎고 주둥이를 만들고 그 안을 파내어 완성하기 때문에 세밀하고도 조심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작품부터 실제 사람 크기의 인체 조각상까지 사이즈는 물론 색상과 패턴까지 조각가로서 활동한 지 20년이라는 긴 세월만큼 폭넓은 작품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비누는 미술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도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고 호기심을 자극해요. 비누가 가진 가장 독특한 습성이 비누를 바라보면서도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게 가능한 재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쓰이고 없어지고 쓰러지는 것 들이기는 하나 비누는 눈앞에 있어도 ‘곧 없어질 것이 아닌가’ 또는 ‘없어지는 것이 더 먼저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것에 공을 들이고 세심한 과정을 거쳤을 때 오는 불편한 마음을 건드리죠. 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는 과정이 천년이 걸리는 반면, 비누는 3년만 지나도 500년 된 유물처럼 변화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우리의 인생이 짧기 때문에 돌이 닳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잖아요. 비누는 그게 가능한 거죠. 시간을 압축하듯 말이에요. 시각적으로 증명되기도 하고 또 심미적으로 건드리기도 하고. 여기에 향이 들어가서 제 작품을 직접 본 사람과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주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