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통해 전하는 고민과 탐구, 막연한 두려움과 자기혐오를 이겨내고 모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기까지. 박그림 작가는 지금, 자신과 불교미술을 향한 먹먹한 애정 그리고 소수에 속하는 모든 이를 위한 평등을 외친다.
한남동에 위치한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는 현재 박그림 작가의 개인전 <虎路(호로), Becoming a Tiger <서울>>이 열리고 있다. 기분 좋게 쏟아지는 볕이 박그림의 작품을 환히 밝혀주는 어느 오후, 이곳에서 박그림 작가를 마주했다. 전통 도제 방식으로 불교미술에 입문한 그는 탱화에 천연 색채를 접목하는 방법을 스승에게 수학했다. 또한 풀을 끓이거나 아교를 만들고 선을 긋는 법 등 불교미술의 기초부터 꼼꼼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이어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며 도제 방식으로 배우던 것과는 배움의 차이가 있었지만 해당 장르의 또 다른 면모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고려 시대의 불화나 조선의 탱화처럼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불교미술이 존재하듯 계속해서 회화적 기량을 쌓아온 박그림 작가는 전통 불교미술과 현대의 교차점에 서서 전통 불화의 현대화를 꾀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박그림 작가가 그간 선보여온 불교적 색채를 기반으로, 호랑이가 주 소재로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침 올해가 임인년, 즉 검은 호랑이의 해인 만큼 호랑이의 존재가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사실 불교미술에서 호랑이는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호랑이라는 존재는 영물로 추앙받는데, 박그림 작가는 불교미술에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에 머무르는 데 그치는 양가적인 부분에 자신을 이입했다. “호랑이는 제 페르소나 같은 존재예요. 제 작품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자전적인 서사를 다루고 있었는데, 호랑이가 등장하기 시작한 심호도 시리즈부터 조금씩 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죠. 우리의 삶에서는 늘 스스로가 주인공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심심찮게 주변인이 되기도 하잖아요.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호랑이를 볼 때마다 느꼈어요.”
이번 전시명 ‘호로 虎路’는 직역하면 호랑이의 길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호랑이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던 박그림 작가가 자기를 혐오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점차 자신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스스로를 보듬어가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작품을 하기 전까지 자신한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타인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동경해 작품으로나마 소유하고자 했고, 첫 개인전이었던 화랑도 전시를 통해 이와 관련한 작품을 공개한 바 있다. 이후 계속된 작품활동을 통해 타인에 대한 동경을 넘어 조금씩 스스로를 보듬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온 셈. “전시나 작품명을 선정할 때면, 다층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을 선호하곤 해요. 정찬용 큐레이터와 함께 지은 이번 전시명은 호랑이의 길로도 읽히지만, 호로자식, 호로게이 등 욕설에 속하는 은어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죠.” 마치 숨겨진 코드를 발견하듯 곳곳에서 퀴어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것 또한 그의 작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아름다운 육체미를 자랑하는 남성이 불화에 등장하기도 하며,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인물이 보살로 그려지기도 한다. 나아가 전작 화랑도에서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이미지를 전복시키기 위해 SNS에서 등장하는 퀴어 인물을 터프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냈다면, 지금은 나아가 성별의 생물학적 구분법이 결국 또 하나의 고정관념임을 인지하고 남성과 여성, 동서양의 요소를 조합해 관념의 경계를 허물고 평등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퀴어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한국화 중에서도 비주류라 평가받는 불교미술, 전통 불화, 도제식 교육 등 우연이든 필연이든 현재 저라는 사람이 지닌 캐릭터는 모두 소수성을 띠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성정체성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저의 눈과 작품을 통해 다양한 소수자들이 평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길 원하는 마음을 담고자 합니다. 더욱이 깨달음을 얻고 경지에 이른 부처님과 같이 고요한 상태, 삼매의 경지에 이르길 바라요.” 그의 말을 통해 다양한 방향으로 자신의 지향점을 정하는 작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3월 27일, 전시를 끝마치면 박그림 작가는 곧이어 다음으로 예정된 전시를 준비한다. 8월, 갤러리 THEO에서 이윤희, 하승완 작가와 함께 단체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10월 일민미술관에서 <뉴트레디션>전, 12월 송은에서 <제22회 송은미술대상>전에 참가할 예정.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예술의 융성 그리고 모두를 동등하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랑으로 무한히 확장되기까지 계속해서 정진할 박그림 작가의 행보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