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테이트 모던 개인전에서 호평을 받은 한국계 미국 미술가 아니카 이 Anicka Yi가 서울을 찾았다. 예술과 과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예술가로 명망이 높은 그녀의 작품은 인공지능, 기후변화, 박테리아, 향기, 환경오염, 페미니즘 등 주제가 다채롭다.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현대 커미션: 아니카 이: In Love with The World> 전시 전경. 인공지능 로봇 작품이 전시장을 유영하며 관람객을 사로잡았다.
글래드스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후각을 간질이는 향기도 그녀의 작품이 다. 향수의 이름은 ‘바이오 그래피 Bioᆞgraphy’이며, 3명의 여성에게서 영 감을 받은 3가지 향을 지닌다. 일본 테러리스트 후사코 시게노부, 고대 이집 트 여왕 하트셉수트, 가상 인공지능 AI로부터 유래된 향수가 버섯 모양의 패키지에 담겨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각 20개 한정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아니카 이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향기는 아니카 이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향수 에 이끌려 향기를 연구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고, 화제를 모았던 런던 테이트 모던 터번홀 전시에서도 그녀의 AI 작품은 향기를 풍기며 전시장을 유영했다. 해양생물을 닮은 인공지능 기계인 에어로브 Aerobe들이 스스로 비행하며 기계가 생태계에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테이트 모던이 위치한 런던 뱅크사이드 지역의 역사를 표현하는 향은 기계와 그들의 새로운 서식지가 된 전시장의 역사 그리고 공간 내 유기체를 연결하는 요소를 강조했다.
글래드스톤 서울의 ‘치킨 스킨’ 신작 앞에 선 아니카이.
“향기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향기만으로 그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낼 수 있고, 향으로 역사적 인물을 떠올릴 수도 있지요. 공기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 모두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는 미술의 너무나 큰 소재가 될 수 있지요. 향기는 공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구이며, 하나의 조각입니다.”
인간은 공기를 흡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타고난 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때로는 그것에 대한 불편함도 야기된다. 인간은 공기 없이 살 수 없으니, 사회 정치적 담론 생성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녀는 향기가 사회계층 차이를 상기시 킨다는 의견에도 확실히 동의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낮은 계층의 사람 이 더 불편한 냄새에 노출되어 있고, 일을 하면서 유독물질을 접하기도 하니 말이다. 남녀간의 화학작용에서도 페로몬 향은 중요하다. 미술가의 작품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고, 많은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향기는 오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취향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향기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서구인들이 시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판단 역시 후각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글래드스톤 전시는 한국에서의 첫 전시이기 때문에 감동적이었습니다. 2살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지만 한국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번이 4번째 방문 인데, 모두 일 때문에 온거라 여행할 시간이 없어 아쉬워요. 한국인으로서 관람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전시를 하고 싶어서 대표 시리즈의 신작을 선보이기로 했습니다.”
연두색 실린더 설치 작품 ‘아이스워터 인 더 베인스’ 색상과 맞추어 카펫을 설치했다.
비록 한국어는 서툴지만 그녀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을 사랑한다.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시가 행복하고,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해조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분명 이런 정서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작품의 이미지에서 언뜻 느껴지는 동양적 단아함도 서양 미학보다는 한국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높은 그녀의 안목에서 비롯되었다. 대학 시절부터 동양철학 책을 많이 읽었고, 무턱대고 아름다움을 보존하려는 고집보다는 썩어가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동양사상에 매료되었다.
뉴욕 작업실을 LA로 이전하려는 이유도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연계가 있다. LA 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로봇과 같은 첨단 산업 기술의 메카가 LA이기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전시장 입구의 연두색 실린더 설치작품 ‘아이스 워터 인 더 베인스 Ice Water in the Veins’에는 해조류가 살고 있다. 실험실 언어를 사용한 일종의 조각이며,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녀는 로봇뿐 아니라 해조류, 곰팡이, 박테리아와 같은 작은 생명체를 즐겨 사용한다. 조류는 지구의 생명체 중에서 큰 질량을 차지하며, 플라스틱의 대체물로도 논의될 만큼 다양한 사용이 가능하다.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기후위기에 대한 작업에도 조류를 사용했으며, 조류에 대한 관심이 커서 책도 만드는 중이다. 전시장 바닥에 깔린 초록색 카펫은 실린더 설치작품의 해조와 같은 색으로 골랐다. 의상도 이와 어울리는 색깔을 선택해 그녀만의 패션 감각을 과시했다.
글래드스톤 지하 전시장의 ‘네스트’, ‘템푸라 프라이트 플라워’ 시리즈의 신작.
“1층 정면에서 보이는 와인 컬러 작품은 ‘아네모네 패널 Anemone Panels’입니다. 컴퓨터그래픽을 연상시키는 매끈한 표면은 디지털 랜더링 이미지의 3차원 구현으로 만들어졌지요. 캘리포니아 곶에서 지내는 동안 관찰한 아메바, 산호와 같은 유기물 요소와 나사 NASA에서 개발한 자성을 가진 페로플루이드의 기하학적 형태를 차용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와인 컬러는 자동차 도색에 쓰이는 소재로 칠해졌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색깔이 달라 보이는 것이 이 재료의 특징이다.
지하에는 ‘템푸라 프라이드 플라워 Tempura-Fried Flower’ 연작이 펼쳐진다. 이 작품은 이름 그대로 꽃을 바삭하게 튀겨 만들었다. 아름다운 상품으로 서의 꽃을 폭력적 행위인 튀김으로 만들어 냄새와 맛, 촉각에 관여한다. 인간의 감각을 강조한 초기 작업의 연작이다. 예술적 생각이나 지성은 이처럼 몸 으로도 경험이 가능하다. 튀긴 꽃에서 지방을 추출하고, 미술 보존 전문가와 함께 레진을 대신 채웠다. 튀긴 꽃과 함께 설치한 아령은 꽃의 섬세하고 미묘함과 대조를 이루는 존재다. 아령이 상징하는 중력과 무거움은 꽃의 일시성과 대비되는 산업적 장치이며, 아령으로 운동하며 몸이 움직였을 때 땀이 나는 것을 연상시키는 감각적 대비도 이룬다.
아니카 이는 현재 밀라노 피렐리 항거 비코카에서도 개인전을 하고 있다.
글래드스톤 지하 전시장의 ‘네스트’, ‘템푸라 프라이트 플라워’ 시리즈의 신작.
아니카 이의 밀라노 개인전 <Metaspore>는 7월 24일까지 열린다.
개인전은 7월 2일까지 청담동 글래드스톤에서 열리며, 2024년에는 리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그녀는 과학에 기반한 작품을 주로 만들기 때문에 특히 거대한 공간에서 작가의 저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미술관 전시의 경우 준비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휴고보스상을 수상하고, 베니스 비엔날레와 휘트니 비엔날레 등 최고의 미술 행사를 휩쓸고 있지만 의외로 첫 개인전은 마흔 살인 2010년에서야 이루어진 늦깎이 작가로 영화를 공부하고 패션계에서 일한 이력이 있다. 2014년 MIT 예술과학기술센터 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과학자들과의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작품의 급속한 진화를 가져왔다. 그녀는 박테리아로도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팬데믹 시대를 맞아 다시 한번 주목받기도 했다. 그녀는 박테리아는 생명의 기원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2015년 ‘검 역텐트 The Quarantine Tents’ 연작을 통해 인류 역사에서 팬데믹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테이트 모던에서 관람객이 인공지능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세명의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은 세 가지 향수.
글래드스톤 서울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에 설치된 ‘아네모네 패널’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부터 특별한 장래 희망은 없었어요. 우연히 미술 작업을 하다 미술가가 되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요즘 미술가로 좋은 기회를 맞아 만끽하고 있는 중입니 다. 앞으로 10~20년 이내에 베스트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미술가는 연륜이 쌓일수록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아니카 이는 과학과 예술, 인간과 기계, 식물과 동물의 개념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수천 년 동안 전해내려온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그녀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아니카 이의 밀라노 개인전 <Metaspore>는 7월 24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