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도자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을 흙으로 전달하고 싶다는 박상준 작가는 조각과 공예의 범주를 넘나들며 시간과 계절, 기억을 작품에 담아낸다.
그릇에 기억을 담아 쌓아올린 ‘Memory of Longview’.
그릇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지탱하며 겹겹이 벽에 붙어 있거나 성인 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게 쌓여 있다. 이는 동양의 물레 기법과 서양의 조형적 장점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도자 예술을 선보이는 박상준 작가의 작품이다. 태극기를 연상시키는 빨간색과 파란색, 도자에 장식된 인화 문양 그리고 우리나라 사발 형태의 그릇…. 조은숙 갤러리에서 열린 박상준 작가의 <Perfect Imperfection in Ceramic>전에서 마주한 작품들의 첫인상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상준 작가.
언뜻 보기에는 동양의 특징만 품고 있지만, 그 내막에는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작가가 자연스레 얻은 문화적 영향과 기억이 녹아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전통 도예가인 당숙아저씨로부터 3년간 분청도자를 배웠어요.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예술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26살에 미국 브루클린으로 떠났어요. 벌써 만 30년 정도가 되었네요.” 한국에서 기본적인 물레 기법을 터득한 덕에 실용적인 그릇을 만들 줄 알았던 그는 미국에서 배운 서양 예술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다. 동양과 서양, 어느 한곳에 치우칠 수 없었기에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작업에도 반영된 것.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 학교에서 그가 원하는 배움을 얻기는 힘들었다.
“대학에서 어느 교수님께서 그릇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평생 그릇을 만져온 저로서는 약간의 반항심도 생기더군요. 그릇을 어떻게 하면 예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선반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봤는데 그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작가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꼭 그릇이 누군가에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완성된 결과물보다 아이디어나 과정을 하나의 예술로 바라보는 개념미술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Memory of Longview’다. 작가는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깊은 향수병에 걸렸다고 한다. 매일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을 그릇에 하나하나 담아 쌓아올린 작품이라고.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로 그 당시 걸었던 숲길의 나무를 표현했다고 한다.
겨우내 5개월 동안 숲에 방치되어 자연을 오롯이 담은 ‘Snow in the Bowl’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겨우내 5개월 동안 숲에 방치되어 자연을 오롯이 담은 ‘Snow in the Bowl’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가을을 담은 ‘Fall in the Bowl’의 과정과 그 결과물.
가을을 담은 ‘Fall in the Bowl’의 과정과 그 결과물.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작품은 벽에 걸린 ‘Fall in the Bowl’과 ‘Snow in the Bowl’이다. 이 두 작품은 가을과 겨울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담아낸 결과물이다.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가마에 굽지 않은 그릇 수십 개를 숲에 설치하고 약 5개월을 기다린다.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와 바람에 쓸려 무너지면서 형태가 변하기도 하고 그릇 위로 떨어진 나뭇잎과 도토리의 자국도 선명하게 남게 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자연의 힘에 의해 마무리되는 것이다.
층층이 쌓은 그릇을 벽에 설치한 ‘Memory of Jersey’.
“마치 농부가 곡식을 거두 듯 어느 정도 알맞은 때를 기다렸다 그릇들을 주워 와요. 너무 오래 방치해도 형체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때’를 작가의 시각으로 캐치해내죠. 이후 초벌과 재벌의 과정을 거쳐 계절과 시간을 오롯이 담은 그릇의 형태로 벽에 설치해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거죠.” 그의 설명에 따라 자세히 바라보니 정말 나뭇잎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개인전이 그의 작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아직 국내에서는 낯설게 다가올 수 있지만 박상준 작가는 이미 해외에서 인정받은 작가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공예쇼 ‘스미스소니언 크래프트쇼’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간 30회 이상의 전시를 개최한 이력을 지녔다.
그릇에 기억을 담아 쌓아올린 ‘Memory of Longview’.
가을을 담은 ‘Fall in the Bowl’의 과정과 그 결과물.
“사실 10년 전 미국 전시회를 통해 조은숙 대표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 제게 개인전을 제안하셨고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제 작품을 어떻게 받아드릴지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전시를 미뤄오다 이제서야 개인전을 열게 되었네요.” 그는 2년 후 백자와 청자를 활용한 새로운 작업을 가지고 또 한번 조은숙 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질 예정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2024년,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박상준 작가의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