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MODERNISM

2023 문화 트렌드 키워드

2023 문화 트렌드 키워드
  2023년을 앞서 예측하는 산업, 사회, 문화 주요 전망. 두 가지 트렌드 키워드에 주목하자.   메타-모더니즘 Meta-Modernism은 현재 세계적인 석학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의 영역에서는 핫한 주제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산업 전반에서 활동하는 기업 리더들의 미래 먹거리 발굴 분석을 위해 사회문화적 이슈를 분석하는 필자에게 지금과 같은 시기는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것보다 좀 더 깊게 잠수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세계보건기구 WHO에서는 마침내 팬데믹의 끝이 보인다고 발표했으며, 점차 전시 및 엔터테인먼트 공연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환경에 민감한 동시에 디지털화되는 공간과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사실, 팬데믹 동안 사람들은 비대면이라는 기술에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메타-모던 사회는 지금껏 우리가 판단해온 절대주의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교차하면서 와이 낫 Why Not으로 사고의 방향을 잡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사회문화적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 2023년은 앞서 말한 메타-모던의 과도기적 사회문화가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업들은 기존 소비 방식의 전환을 리드하기 위한 ‘공생과 상생’ 경영에 힘쓸 것이며, 사회는 어느 때보다 ‘소통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게 될 전망이다.  

MTI 2023 예측 트렌드 1 소셜 엘릭시르

소셜 엘릭시르 Social Elxir란 사회적 묘약을 뜻하는데, 디지털화가 이끄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리얼 라이프에 대한 ‘사회적 처방’을 의미한다. Lisophe가 공표하는 2023년 예측 메가트렌드 인사이트 분석 자료에 의하면, 팬데믹을 겪은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우울과 공포에 대한 경험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문화적 니즈의 확대와 이를 치유하는 정신적 처방 디지털 힐링이 더욱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단순히 스포츠와 웰니스 개념의 명상과 요가가 아닌, 누구나 자신의 스마트폰을 통해 정신적 치유를 시도하는 디지털 뉴트리션 Digital Nutrition 이슈가 주목받을 전망이다. 디지털 뉴트리션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기분 좋은 이미지와 영상이 일상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과학적 근거가 토대가 된다. 영화 <에이디아스트라>에서는 주인공 브래드 피트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주비행을 하기 전 디지털 심리치료를 위해 디지털 약물치료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이 단지 SF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미국에 위치한 AeBeZe Labs은 실제로 디지털 치료제 reSET를 개발했으며, FDA가 승인하는 약물중독 치료용 모바일 앱으로 인정받았다. AeBeZe Labs은 현재까지 총 8건에 달하는 디지털 치료제 출원을 완료했다. 그 밖에도 소셜 엘릭시르 트렌드는 음료 시장의 새로운 이슈를 주목하고 있다. 바로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수면 경제) 시대에 부상하는 건강 음료 시장을 말한다. 펩시코는 늦은 밤 잠자기 전에 마시는 음료 드리프트웰을 출시해 MZ세대의 소비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푹 자는 것이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슬리포노믹스 시대는 특히, 아시아 시장의 MZ세대가 겪는 불면증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MTI 2023 예측 트렌드 2 피지털 슬로 라이프

피지털 슬로 라이프란, 물리적인 피지컬 Physical과 데이터화되는 디지털 Digital이 융합되는 공간이 슬로 라이프 니즈와 만나 새로운 기술 신 Scene과 문화 이벤트가 확산될 것을 전망하는 예측 트렌드다. 팬데믹 기간에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들에 대한 위생적 차원이 부각되면서, 화장품 용기도 대부분 스프레이 또는 스틱 형태로 바뀌고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엘리베이터 승강기 내부 버튼과 문은 비접촉식 기술이 탑재되어 좀 더 조용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부상되었다.  
(위) 태양광 램프 서니, (아래) 슬로 아트 데이
  그 밖에도 네덜란드 디자이너 마르얀 판 아우블러 Marjan Van Auble는 자율 에너지 시스템의 태양광 램프 서니 Sunne를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이 조명은 해가 질 즈음 자동으로 켜지며 해가 뜨기 전, 노을, 태양빛의 3가지 하늘색을 닮은 생물 모방 디자인으로 설계되었다. 리빙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실내에서 은은하게 즐기는 조명을 통해 슬로 라이프의 기술을 어필한다. 그 밖에도 전 세계 박물관은 예술을 천천히 느리게 감상하는 슬로 아트 데이를 제공한다. 이날은 전시장 한가운데 눕거나 옹기종기 앉아서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  
CREDIT
WRITER 이순영(Lisophe 기업미래예측 전문가, 프랑스 혁신 소재 라이브러리 materiO 서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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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프리즈 서울을 기대하는 이유

세계가 기대하는 한국 미술 시장

세계가 기대하는 한국 미술 시장
 

9월 5일 제1회 프리즈 서울이 막을 내렸다. 프리즈 서울은 5년간의 계약 기간 동안 아시아 미술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프리즈 서울로 인해 한국 미술계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 미리부터 궁금해진다.

 
뉴욕 스카스테트 Skarstedt 갤러리에서는 마스터스 섹션에 젊은 작가인 카우스 KAWS 작품을 선보였다.
  프리즈 Frieze와 아트바젤이 세계 2대 아트페어로 우뚝 섰다. 세계 3대 페어의 하나로 불리던 프랑스 피악 Fiac이 아트바젤에게 파리 전시장을 내주면서 사라질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파리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던 피악이 하루 아침에 추락한 데에는 기업 간 얽히고 설킨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크다. 서울에서 아시아 최초로 프리즈가 열리는 것도 물론 경제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특히 주식과 부동산이 하락세를 보이며 금리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미술 작품 컬렉션을 투자의 대안적 개념으로 보는 MZ세대가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아트바젤 홍콩이 팬데믹과 반정부 시위로 잠시 주춤했고, 상하이 웨스트번드 아트&디자인이 중국의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위기를 맞이한 것도 플러스 요인이다.
데이비드 아론 갤러리 전시 전경.
  코엑스에서 같은 기간 동안 동시에 열린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KIAF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이들이 많은데,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유진상 교수는 이러한 생각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작품을 팔기 위한 아트페어에서 대형 전시로써의 주제나 공간 연출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아트페어는 ‘전시’가 아니고 ‘시장’이기 때문이다. “KIAF는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회원 갤러리 중심의 아트페어이고, 프리즈는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의 아트페어입니다. 올해는 둘 다 매출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프리즈 서울의 매출은 KIAF의 10배 이상인 6천억원 정도로 짐작되고 있으며, 몇 년 내로 우리나라 미술 시장 1년 거래액인 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단 4일 만에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는 세계적인 대표 아트페어이니 만큼 올해는 서로를 파악하는 파일럿 행사였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아시아 미술 시장에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것을 기대합니다.”  
다니엘 크라우치 레어 북스의 중세 지도.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이 마졸레니 Mazzoleni 갤러리 등 마스터스 섹션의 여러 갤러리에서 선보였다.
  제1회 프리즈 서울의 하이라이트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이었다. 프리즈 마스터스는 미술사에 남을 고대에서부터 근대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섹션이다. 원래 런던에서는 프리즈 런던과 프리즈 마스터스가 각각 열리는데, 프리즈 서울에서는 페어의 한 파트로등장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울을 찾은 프리즈 마스터스의 디렉터 네이선 클레멘트 길레스피 Nathan Clements Gillespie는 2022년은 프리즈 마스터스 10주년이자 프리즈 마스터스가 아시아에 처음 데뷔하는 중요한 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 아직 이런 형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미술 애호가들에게 이를 선보인다면 관심을 가질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섹션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었습니다. 리처드 나기 갤러리의 에곤 실레 작품과 애콰벨라의 피카소 작품을 자세히 보고 싶어하는 관람객의 열정을 확인했습니다.”  
닥터욘 군터 레어 북스의 15세기 책 하트만 셰델 Schedel의 <뉘른부르크 연대기 Nuremberg Chronicle>.
  프리즈 서울에는 21개국 110개의 갤러리가 참여했으며, 마스터스 섹션에는 이중 18개의 국제적 갤러리가 부스를 꾸렸다. 애콰벨라 갤러리즈에서는 전 후 시대 주요 작가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프란시스 베이컨, 바스키아, 자코메티, 몬드리안, 앙리 마티스 등 한국인이 존경하는 거장의 작품을 가져와 작품 앞에 접근 금지선을 설치해야 할 정로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카스텔리 갤러리는 로이 리히텐슈타인 솔로 쇼, 갤러리라 컨티누아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솔로 쇼를 선보였다. 특히 다니엘 크라우치 레어 북스 Daniel Crouch Rare Books와 닥터 욘 군터 레어 북스 Dr. Jörn Günther Rare Books는 오래된 지도와 아름다운 책을 선보여 인기를 모았다. 다니엘 크라우치 레어 북스는 지도 제작자 드 조드 De Jode가 1593년 출판한 최초의 유럽식 지도를 포함한 서구권 지도 제작법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담은 다양한 지도를 선보였다.  
김환기, 하종현, 장 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을 선보인 국제갤러리 부스.
  도쿄 갤러리는 전후 일본 세대와 한국 작가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을 전시했다. 미야와키 아이코 Aiko Miyawaki, 수가 키시오 Kishio Suga 등의 일본 미술가와 김창열, 김환기, 이강소, 박서보, 윤형근의 작품은 아주 잘 어울렸다. 고미술을 다룬 데이비드 아론 갤러리와 악셀 베르보르트의 우아한 부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오랜만에 국내외 유명 갤러리가 모두 참여했다는 것도 프리즈 서울의 자랑이다. 해외에 나가야만 방문할 수 있는 갤러리 부스를 서울에서 보고,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미술 애호가에게 매력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2023년에는 심기일전해서 아트바젤과 흡사하면서 개성과 스펙터클이 없다는 비판을 정면 돌파해야 할 것이다. 아트바젤에도 마스터스에서 볼 수 있는 거장의 작품은 매년 출품된다. 프리즈가 IMG 그룹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앞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IMG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기업 엔데버의 자회사인데, CJ가 얼마 전 엔데버를 인수한 것. CJ가 리움미술관에서 프리즈 서울 오프닝 파티를 연 것에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 나라의 미술계가 국제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술가만 노력해서는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미술가와 미술관, 갤러리와 기업, 정부와 미술 애호가가 모두 합심해야 가능하다. 프리즈 서울은 올해가 첫 해이니만큼 칭찬만큼 비판도 많지만, 내년에도 KIAF 와 동시에 열리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적합하다. CJ가 앞으로 프리즈 서울과 전략적으로 협업한다면 아시아 미술 시장의 지형도가 달라질 것이며, KIAF와 한국 미술계도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스터스 섹션을 통해 돌을 주제로 한 작가 3명의 작품을 선보인 갤러리 현대 부스.
  미술 애호가라면 10월에도 바쁠 것이 분명하다. 이번 10월에는 런던에서 프리즈 런던과 프리즈 마스터스가 열리고, 파리에서는 제1회 아트바젤 파리+가 열린다. 네이선 클레멘트 길레스피 디렉터는 런던 행사가 두 개이기 때문에 사전에 참여 갤러리와 작가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알고 온다면 보다 효율적으로 아트페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의 국제갤러리가 스포트라이트 부문에서 최욱경의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갤러리 현대가 이강소의 단독 전시를 보여줄 예정이어서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트페어를 찾는 이들을 위한 네이선 디렉터의 가장 중요한 조언은 편한 신발을 신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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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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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담긴 무게

파멸 속에서 피어난 안젤름 키퍼

파멸 속에서 피어난 안젤름 키퍼
  안젤름 키퍼가 그린 작품은 파멸 속에서 피어났다. 작가 자신도 그랬다. 그 끝에는 희망이 있음을 믿기에, 그냥 계속 나아간다.   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의 작품은 첫인상이 무겁다. 작품 앞에 서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잘 몰라도,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감각부터 느껴지는 아우라까지 그 주제가 심오하고 어둡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다. 키퍼는 작품의 소재로 납이나 콘크리트, 흙, 말린 식물, 유리, 철조망, 책, 낫 등 일반적이지 않은 오브제를 사용한다. 거대한 작품의 크기와 어두운 색채에서 오는 중압도 고스란히 관람자에게 전달된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그의 삶에서 비롯됐다. ‘1945년생 독일 미술가’, 단 한 줄의 정보가 안젤름 키퍼와 그의 작품을 설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2022. ©Anselm Kiefer
  2차 세계대전, 키퍼는 참담한 비극과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 전후에도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 혼란했던 환경에서 유년기를 거쳤고, 가늠할 수 없는 자괴와 고뇌 끝에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했다. 사회적으로 당시 독일은 큰 과제를 당면하고 있었다. 독일이란 오염된 국가적 정체성과 국제적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것. 독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 하나가 미술이었다. 미술이란 보기 좋은 구실로 과거의 오류를 청산하고, 현재를 극복하는 변혁을 꾀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미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보다 직접적이고 전위적인 각성을 촉구했던 젊은 세대가 있었으니 안젤름 키퍼였다. 그는 갖은 반향에도 불구하고 나치 시대뿐만 아니라 독일의 역사와 문화에 비판적인 시각을 투영했으며, 이로 인해 상처를 치유하고 자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하길 바랐다.  
작품 상단에 키퍼가 직접 쓴 작품 제목이 있다. 가늘고 연하게 쓴 부자연스러운 글씨는 일종의 재료처럼 표현상의 기법으로 기능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 2016~2022. ©Anselm Kiefer
  안젤름 키퍼는 체험에서 비롯한 경험을 중시했고, 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오브제는 이러한 자극을 위한 중요한 상징이자 수단이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반으로 역사적, 문화적, 신화적 소재에서 촉발한 다층적인 주제에 천착했다. 지난 40년간 작업의 형식도 꾸준히 발전했다. 그리고 2022년,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리는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 <지금 집이 없는 사람 Wer Jetzt Kein Haus Hat>에서 그의 근작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회화와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릴케의 시 ‘가을날’은 가을을 주제로 계절의 변화와 덧없음, 부패와 쇠퇴를 노래한다. 키퍼는 “릴케의 시는 60여 년간 내 기억 속에 존재해왔다. 나는 그의 많은 시를 암송할 정도로 알고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존재하며,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말한다. 키퍼의 작품은 어스름한 나무의 윤곽과 단풍이 물든 나뭇잎,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서서히 회색빛을 띠는 겨울 나무를 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실제로 작품이 자연에 풍화될 수 있도록 일부러 빗속에 내놓는 등 더위와 추위 같은 날씨까지 작품에 담았다. 이는 흘러가는 시간의 황폐함과 삶의 덧없음에 대한 환기인 동시에 시인 릴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다.  
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
  전시장 가운데는 진흙 벽돌로 된 설치작품이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과 잔해 사이에서 자랐던 작가의 유년 시절이 만든 결과다. 부재했던 쉼터에 대한 상기이자 인간이 만든 것을 자연 순환계로 연결시키기 위한 의도로 작품에 파괴와 재건 그리고 재탄생의 의미를 담았다. 이로써 전시장에는 과거로부터 혹은 현재 반쯤 지어지거나 반쯤 파괴된 작품이 있다. 작가의 여타 작품처럼 작품 세계 전반에 드리워진 어둠과 무게가 여전히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전에는 희망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릴케의 시에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듯 자연의 주기처럼 파괴와 소멸 뒤에 탄생과 성장을 기대하는 것이다. 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올 것이기 때문에. 전시는 10월22일까지.
CREDIT
어시스턴트 에디터 강성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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