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도에 경계가 있다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세상의 모든 경계선 위에 올라 줄타기하며 서커스를 선보인다. 어릿광대를 자처하며 때론 사기꾼이라 불리는 그는 자신의 정체를 미술계의 침입자라 밝힌다.
‘코미디언(2019).’
2019년 12월 세계적인 미술 축제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커다란 벽에 덕테이프로 붙인 바나나 하나가 출품됐다. 작품명은 ‘코미디언’, 가격은 무려 한화 1억4천만원. 작품 앞을 지나가던 한 행위예술가가 배가 고프다며 바나나를 떼서 먹어버린 에피소드와 그럼에도 몇 분 뒤 아무렇지 않게 신선한 새 바나나로 교체되었다는 후일담까지. 작품명 그대로 웃기지도 않은 논란 속에서 코믹한 상황을 연출한 이 작품의 작가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이다. 정치, 사회, 종교, 경제,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빠꾸 없는 작품을 출품하며 갖은 논란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자 <메종> 독자라면 익숙한 잡지 <토일렛 페이퍼>를 창간하기도 했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진 이후 돌연 은퇴를 선언했지만, 새 바나나로 교체하는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2023년 서울로 돌아와 최대 규모의 개인전을 열었다.
고통에 겨워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십자가를 움켜쥐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아홉 번째 시간(1999)’.
사실 카텔란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현대미술가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고, 1980년대 가구 디자이너로 처음 창작을 시작했으며, 1989년 29살이 되어서야 미술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어렵게 첫발을 내디뎠지만,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말은 이탈리아 사회의 전반적인 가치 체계가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불안과 분노, 열등과 반감은 고스란히 작품에 녹아들었고, 이러한 저항정신은 카텔란의 작업관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카텔란의 작품에서도 가장 큰 논란을 야기했던 ‘아홉 번째 시간’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신성 모독이란 이유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가톨릭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바티칸 시국의 원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맞아 고통스럽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 수녀인 여자 형제가 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카텔란이 이러한 작품을 만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종교 권위에 대한 반발은 아니라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이기 전에 신의 섭리에 종속된 연약한 인간일 뿐이며, 어떠한 권력과 신념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해학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용서를 구하는 아돌프 히틀러, ‘그(2001)’.
지배 세력에 도전하는 또 다른 작품 ‘그’ 역시 온갖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함부로 거론할 수 없는 볼드모트 같은 이름을 가진 ‘그’는 누구일까? 관람객은 저 멀리 뒤돌아서 무릎을 꿇은 채 반성하거나 벌을 서는 듯한 어린 학생에게 천천히 다가가게 된다.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하는데, 역사상 가장 잔혹한 악인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생전에 참회하지 않았지만, 카텔란의 작품 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굴복한 채 두 손을 모아 용서를 구하고 있다. 관람객은 히틀러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잔존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기하면서 과연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 혹은 그는 신께 용서받을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된다. 이외에도 카텔란은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갤러리스트를 전시장 벽에 강력 테이프로 옴짝달싹 못하게 붙여버리거나, 자신에게 할당된 전시 공간을 광고 대행사에 팔아넘겨 작품 대신 향수 브랜드를 선전하는 광고판을 걸어두어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의 위력을 증명하기도 했다(이번 전시에서는 코오롱스포츠와 NC소프트가 선정돼 광고판을 걸었다).
‘모두(2007).’
비판과 풍자, 해학과 유희를 사뿐사뿐 넘나들면서 정곡을 찌르는 모두 까기 인형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관념에 도전하면서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놓는다. 2023년 7월 16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카텔란의 개인전 제목 <WE>는 그가 던지는 모든 질문이 결국 ‘우리’를 향해 있음을 암시한다. 미술관 바닥에 나란히 놓인 9개의 조각 ‘모두’는 천으로 덮은 시신을 연출한 작품이다. 죽음에 대해 재고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리움미술관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서 최근 일어난 참사의 기억을 소환하고 추모하며 한국 사회의 ‘우리’와 함께 공감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