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 공예 갤러리 모순 서울이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
덕수궁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마주하는 고즈넉한 동네, 정동.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이른바 사대문 안에 자리해 예부터 왕실의 친가와 양반 관료들이 주거지로 삼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100여 년 역사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신아기념관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싱어미싱회사의 한국 지부로 세워져 1960년대 신아일보사의 별관으로 사용됐던 그 건물. 중국에서 공수한 붉은 벽돌과 근대의 건축 기법이 잘 남아 있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10여 개의 업체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축, 인테리어, 패브릭, 도자기, 브랜드 홍보 등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지난 2월 이곳에 터를 잡은 모순 서울도 그중 하나. 30대 중반의 젊은 남성이 운영하는 신생 공예 갤러리라니, 그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사연이 꽤나 궁금해졌다. “저는 굉장히 다양한 일을 해왔어요.” 모순 서울의 대표이자 큐레이터인 김예빈이 말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그의 이력은 처음부터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체계적이다. 어릴적부터 해외를 오가며 학창 생활을 한 뒤 3년간 영화판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며, 부암동 젓가락 갤러리 ‘저집’의 매니저, 아트먼트뎁의 아트 디렉터, 매거진B의 브랜드 마케터 등 얼핏 봐도 30대 중반의 이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분야다. “미국 대학에서 회계와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군입대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과연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다들 통상적으로 하는 생각인데 저는 일단 저지르는 편이라 무엇이든 해보자는 생각이었죠.” 20대 때 산책하다 발견한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던 저집 갤러리 매니저 일도 그중 하나다. 당시 해외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옻칠 젓가락과 나전칠 젓가락의 구매 문의가 쇄도했는데 그 커뮤니케이션 일을 담당했던 것. “우리 공예품이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깨달은 계기가 됐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이 생기면 작은 막사발 하나 사고, 달항아리 사고 또 돈 모으면 황학동 가서 고가구 하나 사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잖아요. 단색화 같은 회화에 비해 한국 공예와 고가구 쪽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을 제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부동산을 구하는 데에만 7개월이 걸렸다. 어떤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할지 부터가 큐레이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에 타협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신아기념관은 첫 페이지를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꼭 알맞았다. 80㎡ 남짓한 공간은 재정비를 마치고 단아한 화이트 큐브로 재탄생했다. “에르메스에서 했던 캠페인 중에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어요. 형태는 달라도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아름다움도 결국은 전 세계를 풍미해온 유럽의 예술 문화와 뿌리를 공유해요. 결국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인간 철학의 산물이니까요. 얼핏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름도 모순이라 지었어요.” 그가 기획한 첫 전시는 각기 다른 분청 기법을 사용하는 세 도예작가의 단체전 <Covered in Fog>. 안개가 낀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청 도자기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작가들을 일일이 찾아가 PT를 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모두 그의 진심에 흔쾌히 응했다. 자작나무 숲을 분청 조각으로 표현하는 박성욱 작가와 표면에 문양을 찍는 인화 기법을 사용해 조각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김진규 작가, 단풍처럼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인 김상만 작가의 작품이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달항아리부터 2만원대 컵까지 실생활에서 공예를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격대로 큐레이션했다. 지금은 4월부터 예정되어 있는 박홍구 작가의 소반전 기획이 한창인데, 전시마다 새로운 가구와 플레이 리스트, 향을 선보일 예정. “신생 갤러리로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동안 해왔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다음 전시부터는 에디터도 함께 모든 기획에 동참할 예정이에요. 작가의 진솔한 내면을 담은 인터뷰와 영상도 만들 계획이고요. 전시 기간이 끝나도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해외 컬렉터들과 B2B 시장 쪽으로 홍보를 넓혀갈 계획이에요.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단순히 작품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한국의 아름다움을 해외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무엇보다 공예를 좋아하는 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