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감싸고 있던 피막을 벗어 던지고, 삶과 예술의 해방을 꿈꾸었던 하이디 부허의 예술 세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앞길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 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 번 두 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 YB(윤도현 밴드)의 노래 ‘나는 나비’의 첫 소절이다. 하이디 부허 Heidi Bucher의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이 노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벗은 혹은 벗겨낸 허물에는 아프고 갑갑했던 번데기 속 마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를 거닐면서 자신의 피부를 뜯어내야만 했던 작가의 생애를 거슬러 곱씹어봤다.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과 그의 요양원 입구를 스키닝한 ‘작은 유리 입구’ 크로이츠링겐 벨뷰 요양원(1988).
하이디 부허는 여성들에게 기회가 매우 제한된 스위스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을 만큼 폐쇄적인 사회였다. 그녀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 예술가로서 개인과 사회의 억압된 구조에 저항하며 해방을 시도했다.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었지만 너무나 단단했던 그곳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대표적인 행위예술이 ‘스키닝 Skinning’이었다. 스키닝이란, 공간 전체 벽에 부레풀을 섞은 거즈 천을 덮고 그 위에 액상 라텍스를 바른 후 건조되어 굳어지면 물리적인 힘으로 뜯어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라텍스가 덮고 있던 건물 벽의 모습이 그대로 거즈에 자국으로 남는다. 부허는 스키닝 작업을 ‘피부를 생성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의상 ‘잠자리의 욕망(1976)’.
특히 젠더 구분이 명확했던 아버지의 서재 벽과 그곳의 마룻바닥 등 가부장적 위계성이 내재된 공간 전체를 스키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피부를 직접 손으로 떼어냈고 전시장에 걸었다. 작가는 수세대에 걸친 가문의 흔적을 채집하고, 그 역사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실제로 전시장에는 부허가 딱딱하게 굳은 라텍스를 힘겹게 뜯어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그 행위가 상처 난 자리에 연고를 바르고 시간이 지나 굳은 딱지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지가 떨어져 나간 곳은 새살이 돋고, 할퀴고 베였던 고통과 기억은 벗겨졌다. 이렇게 집 안 모든 공간을 벗겨내는 데 2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하이디 부허가 갈망했던 해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1988년, 작가는 크로이츠링겐에 방치된 벨뷰 요양원을 방문했다. 이곳은 4대에 걸쳐 정신과 의사로 일해온 빈스방거 가문이 운영하던 시설이었다. 빈스방거 박사는 ‘히스테리아’란 전환장애 증상을 여자의 특성에 한정해서 진단했고, 여성혐오로 귀결된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 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 부허는 여성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벨뷰 요양원의 기억과 흔적을 다루고자 했다. 정신과 의사 빈스방거의 진찰실과 요양원 입구 및 내부 곳곳을 스키닝했고, 당시 여성들이 이곳에서 느꼈을 두려움과 아픔만 고스란히 떼어내 전시장으로 옮겨왔다. 실제 진찰실 크기로 설치한 사각형의 피막 가운데 서 있을 때는 소름 끼치는 공기의 무거움과 목을 조여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1976년 하이디 부허는 거즈와 라텍스로 잠자리 형상을 만들어 입은 바 있다. 그녀는 잠자리를 동경했었다.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며 성장해 마침내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잠자리처럼 자신의 작업을 ‘변신의 과정’이라고도 말했다.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꿈꿨던 것이다. 단단한 껍질은 보호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벗고 나와야만 진정 비상할 수 있다.
‘잠자리의 욕망’을 입은 하이디 부허 취리히(1976).
작가의 탈피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가정 그리고 사회로 점차 확장하는 양상을 보이며 끊임없이 껍데기를 벗어나왔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전시에서 작가가 남긴 수많은 허물을 보며 30년 전 작고했지만, 잠자리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갔을’ 그녀를 상상해보라. 전시는 6월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