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돌아가던 서울의 시간을 정지하고 전남 구례에서 새로운 삶의 속도를 발견한 사진가 박성언의 전시가 열린다.
35년. 사진가 박성언이 유행의 최전선이었던 잡지사에서 사진을 찍은 기간이다. 그는 7년 전 정신없이 돌아가던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전라남도 구례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도시에서의 삶이 종착역 없는 순환선이었다면 구례에서의 삶은 마침표, 쉼표, 물음표 등 다양한 부호가 곳곳에 가득하다고 말하는 사진가 박성언. 첫 2년간은 정신없이 나무와 허브를 심고 가꿨다. 수확의 기쁨도 맛보았다. 처음 보는 꽃들이 신기했고, 꽃에서 열매가 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라는 채소,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놓은 열매들을 찍기 시작했다. 파, 마늘, 달래, 브로콜리, 가지 등에서 자라나는 꽃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과 달리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치 열매로 다 내주어도 나의 존재감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멀리 산 둘레 길을 걸으면서, 마을을 산책하며, 동네 담장을 기웃거리며, 어르신들이 가꾸어 놓은 것들에서, 때로는 마당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소재를 얻는다. 식물 옆에는 언제나 애착이 담긴 오래된 물건이 함께 자리한다. 그는 매일 이른 새벽,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얕고 희미한 빛을 부분적으로 모으고 막는 다징 Dogding과 버닝 Burning 기법을 통해 흑백의 농도와 명암을 조절한다. 빛을 통해 평면적인 사진에 생명력을 주고 싶었다는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깊이감을 강조한 서양의 정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가올 9월, 갤러리 클립에서 그의 시선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때로는 침묵하는 듯, 때로는 살아 움직이는 듯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작품이 당신을 기다린다.
사진 찍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시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자연스럽게 기회가 많았던 만큼 카메라가 친근한 장난감 같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수순처럼 사진반에 들어갔고요. 교대에 가려고 재수에 이어 삼수를 하려고 하던 중, 우연히 친구한테 서울예대에 사진과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했습니다.
잡지사에서는 주로 어떤 사진을 찍었나요?
<주부생활> <마담 휘가로> <엘르> <마이웨딩> 등 매체에서 패션이나 리빙, 인터뷰 쪽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편견 없이, 사각 없이 해보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다 해본 것 같습니다. 특히 인터뷰 사진을 찍으면서 인물에 어떤 식으로 조명을 써야 하는지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인물의 특징과 매력을 잡아내는 데 빛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지니까요. 그때부터 어찌 보면 빛이 가진 매력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한 이유가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 것도 있고, 평소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두 가지 생각이 접점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 것 같아요. 일을 마치니 굳이 서울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삶을 기대하고 서울을 떠난 거죠.
바쁜 삶에서 벗어나 시작한 구례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한마디로 ‘미친’ 그 자체였어요. 맨땅에 나무를 심고 돌을 주워서 마당에 깔고, 정말 몸으로 다 했다고 할까요. 우리 집에 있는 나무는 제가 다 심었죠. 전원생활에서 수확의 기쁨을 맛본 첫 해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년처럼 일만 했어요. 그러고 나니 4~5kg나 빠졌지만(웃음) 정말 즐겁고 행복했어요.
평소 하루 일과에 대해 들려주세요.
나른과 나태의 사이랄까요. 오전에는 사진 작업도 하고, 때로는 예초기를 돌려서 풀도 베고, 나무 전지도 하지요. 잡초를 뽑고 수확한 것으로 요리를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반려견 서로를 위한 하루이기도 해요. 서로는 저의 동반자, 친구, 가족입니다. 혼자 가기 어려운 숲길도 서로가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서로와 같이 서로서로(each other) 도와가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런 하루죠.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빛의 시간은 언제인가요?
해 뜨기 전 새벽 시간. 구례는 봄가을로 안개가 많아서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이 수묵 풍경화로 보이는데 그런 느낌이 좋아요. 구례에서의 첫 해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가 무서웠어요. 그러다 살면서 자연스레 안개가 좋아졌어요.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식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고요.
많은 사물 가운데 식물을 찍기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건물 숲이 아닌 초록 숲을 더 많이, 길게 보게 되면서 좀 더 면밀히 곱씹어보던 중 당시 식물이 제 마음에 들어왔어요. 처음 보는 또는 몰랐던 꽃을 보는 그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당근꽃 본 적 있으세요? 주변에서 발견하는 식물도 찍었지만 제가 직접 키운 작물을 찍으면서 더욱 애착이 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정도 역시 높은 만큼, 식물과 함께 한 프레임에 넣고 있어요. 누군가 지독히 사랑한 탓에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곁에 머물게 되었다는 오래된 물건. 그 물건에 갖는 애정과 식물과 꽃, 그것들을 한곳에 묶게 된 것이죠.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사진 작업은 제가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었고, 구례에서 새로 발견하는 것들이 재미있어서 시작한 작업입니다. 그저 제 자신한테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누구한테 꼭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 인스타그램 계정(@supboto)에 하나둘 올렸다가 진행된 전시입니다.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분들이 오셔서 그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각자의 멋대로 느끼보시면 좋겠어요.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14일은 프리오픈이고 이후에는 갤러리 클립 관장인 정성갑 씨의 인스타그램(@editor_kab)을 통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