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나는 한국에서 시판되는 아홉 가지 색깔의 물감을 전부 모아 캔버스에 펼쳤다.
그러자 단조로웠던 그간의 무심에 알록달록한 색이 나타나면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같은 레드는 없다”는 지론을 들었다. 보통은 립 색깔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당장 <메종> 9월 호를 다시 펼쳐봐도 ‘빨강’이란 단일 명칭으로 묶을 수 없는 다채로운 빨간색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 수많은 뷰티 브랜드의 립 색깔이 다른 것처럼,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하는 색도 미세하게 각기 다르고,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물감의 색은 더욱 다양하다. 2023년의 박미나 작가는 국내에 시판되는 그런 물감의 색을 전부 모았다. 그렇게 모은 물감을 한데 모아 이번 전시 <아홉 개의 색, 아홉 개의 가구>를 이뤘다. 작업의 단초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원을 막 졸업한 작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오렌지’ 그림을 찾는 갤러리스트의 문의 전화다. 예술 작품의 용도나 색에 대한 구매자의 취향, 인테리어 트렌드 같은 세속적인 이 에피소드에서 작가가 집중한 것은 오렌지 ‘색’에 대한 탐구다. 학창 시절부터 시각적인 세계를 인지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오렌지 물감을 모두 수집해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색이라는 대상이 얼마나 관념화되었고 관행적이었는지,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지 그 괴리를 목격하게 된다.
오렌지색에서 출발한 작업은 2004년 <아홉 개의 색과 가구>로, 그리고 이번 전시 <아홉 개의 색, 아홉 개의 가구>로 진화한다. 아홉 개의 색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자주색과 흰색, 회색, 검은색으로 다양한 크기의 가구 다이어그램과 짝을 이룬다. 컬렉터의 의뢰로 특정 아파트 거실에 최적화된 오렌지 페인팅과는 달리, 가상의 모델하우스를 구상한 이번 프로젝트는 작업 당시의 주거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4년 버전은 중산층이 선호하는 강남 브랜드 아파트의 통상적인 천장고 230cm를 기준해 세로 길이 227cm 회화를 제작했다. 당시 수집 가능했던 총 632개 물감은 제조사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나열해 2cm 두께의 스트라이프로 칠해졌다. 그다음 물감의 개수에 비례해 비슷한 크기의 가정용 가구를 찾아 도형과 결합해 완성했다. 19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는 물론 가치관의 변화, 팬데믹으로 인한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까지. SNS는 개인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일인당 국민소득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2023년 버전은 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듯 물감의 가짓수 역시 두 배 가까이 많아졌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수집한 물감은 총 1,134개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 최고가 아파트 내부를 조사하면서 천장의 높이가 최소 30cm 이상 높아진 점도 발견했다. 집을 자랑하는 SNS에는 명품, 하이엔드 같은 키워드가 도배되고, 럭셔리 잡지에는 컬렉션 가구가 단골 특집 기사로 올랐다. 그 결과 초록색 물감 234개와 소파, 파란색 물감 202개와 침대 등 TV 유닛, 라운지 체어, 테이블, 오토만 등이 아홉 개의 색과 조합을 이뤄 257cm 높이의 회화 아홉 점으로 탄생했다.
박미나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색깔의 명칭에 절대 부합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감의 존재다. 주황색 작품에 보이는 선명한 검은색이나, 파란색 작품에 보색 대비가 뚜렷한 빨간색이 있는 등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색’은 인간의 판단에 근거한 보편적 합의가 아니란 점이다. 그보다는 물감을 제조하고 판매, 유통하는 산업 시스템이 주창하는 정보를 우리가 수동적으로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욕망을 이용하는 기업들의 전략이 어떻게 인지 행위를 좌우하는지 밝히며, 더 나아가 색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지금보다 훨씬 더 주관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박미나의 수집 목록에는 미국의 건축자재 브랜드 홈디포가 배포하는 색상 스와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기업이 물감색을 지칭하는 이름이 흥미롭다. 파란색을 지칭하면서 행복의 추구, 선원의 꿈을 말하거나 흰색을 정원 장미 화이트, 평화로운 흰색, 진심 어린 흰색, 복숭아 한 꼬집 등 추상적인 단어로 명명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소주 그린’, ‘쌀밥 화이트’ 정도 되시겠다. 작가는 이 같은 색을 보면서 문학적이며 풍부한 감수성의 시를 읽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녀가 정리한 천여 가지 아홉 개의 색과 아홉 개의 색으로 만든 회화 작품. 실제 주거 공간에서 가구가 놓이는 벽면의 높이와 가구 위에 그림을 걸 수 있는 위치와 최대 크기까지, 마치 집을 거닐 듯 전시 공간을 누비면서 화려하게 펼쳐놓은 색의 향연을 감상해보시길. 전시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10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