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으로 치닫는 전 세계의 이상기후는 더 이상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기상기구(WMO)가 향후 5년 안에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무려 66%에 달한다고 발표한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디자인 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버려진 소재를 재활용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생분해 소재를 개발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기업의 생태계에도 변화의 물결을 불러일으킨 지속가능성 이슈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담론이다.
의자가 된 어망
스톡홀름에 기반을 둔 디자인 스튜디오 인터레스팅 타임스 갱 Interesting Times Gang(ITG)은 생체 재료와 순환성, 신흥 기술을 통한 미래 디자인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는 재활용 어망을 활용한 켈프 Kelp 컬렉션이다. 이는 지속 불가능한 어업 관행과 해수 온도 상승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바다 숲인 켈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되었다. 버려진 어망과 목재 섬유를 조합해 3D 프린팅을 했고 계속해서 재사용할 수 있는 초록빛 의자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식자재로 활용한 작업도 흥미롭다. 주택 건설업체인 오보스 OBOS와 협업해 균사체와 오렌지 껍질로 만든 두 가지 파티션 베그로 Veggro 시리즈를 공개한 것. 균사체로 만들어진 룸 Loom은 버섯에서 영감을 얻어 패턴을 만들었으며 오렌지 껍질로 만든 주고소 Jugoso는 과일의 소포를 기반으로 기하학적 패턴을 제작했다. 그 결과 인테리어의 장식으로 활용해도 손색없는 감각적인 디자인을 입은 패널이 탄생했다.
WEB www.itg.studio
목욕 스펀지의 재발견
루파 Luffa 프로젝트는 아랍 문화권에서 수세기 동안 목욕 스펀지로 사용되고 있는 식물의 한 종류인 루파에서 출발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디자이너 새머 셀박 Samer Selbak은 루파를 활용한 조명 셰이퍼 Saffeer와 스크린의 역할을 하는 리프 Reef를 제작했다. 대각선으로 매달린 셰이퍼 펜던트 조명은 염색한 루파 섬유를 평평하게 펴낸 후 사다리꼴 모양으로 바느질해 형태를 만들었다. 또 강철로 내부를 단단히 고정해 지속가능성이라는 의미와 조명으로써의 내구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리프 스크린 역시 염색한 루파 섬유를 바느질해 디자인했으며 부분적으로 입체감을 줘 신비로움을 더했다. 뛰어난 내구성과 생분해 가능한 루파는 다가오는 미래에 꼭 필요한 재료임이 틀림없다.
WEB samerselbak.com
새 생명을 얻은 폐마스크와 폐비닐
업사이클 소재를 활용해 가구와 오브제를 만드는 김하늘 디자이너는 폐소재의 숨은 가능성을 탐구하며 지속가능한 디자인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에 초점을 두고 활동한다.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는 ‘스택 앤 스택’ 작품을 통해서다. ‘쌓이고 쌓인다’를 의미하는 이 작품은 하염없이 쌓여가는 폐마스크를 쌓아 녹이고 굳혀 만들었다. 이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고 이내 단단한 스툴이 완성되었다. 그저 얇은 천이었던 마스크는 마침내 단단하고 질긴 플라스틱의 내구성을 갖게 되었다.
최근 그가 일회용 비닐 쇼핑백을 활용해 선보인 현대백화점 면세점과의 협업 전시도 눈여겨봐야 한다. 막대한 양의 백화점 쇼핑백을 해체하고 재조립해 마치 체크무늬 패턴의 섬유처럼 만들었고, 이를 가구와 오브제 등으로 변환해 전시장을 채웠다. 전시는 10월까지 현대백화점 면세점에서 진행된다.
INSTAGRAM @neulkeem
페트병으로 만든 패브릭
벽지와 패브릭, 퍼니처 커버링 등을 생산하는 네덜란드 텍스타일 브랜드 베스콤 Vescom은 소재부터 생산 공정까지 리사이클링에 진심인 회사다. 현지에서 수거한 페트병을 플레이크로 잘게 부순 뒤 100%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원사로 압출하고 염색한 뒤 직조하는 것. 세련된 150가지 패턴, 2,000여 가지가 넘는 컬러의 패브릭을 생산하는데, 실용성에 있어서도 일반 패브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내구성과 불이 잘 붙지 않는 난연성을 지녔다.
특히 부클레 업홀스터리 직물은 플라스틱에서 뽑은 소재라 하기에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촉감을 지닌 것이 특징. 모든 제품은 국제 섬유 안전 인증인 오코텍스까지 받았다. 이뿐 아니라 제조 공장에서도 친환경 방식으로 생산한 전기와 가스만을 사용한다고 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WEB vescom.com
나무 부산물이 지닌 가치
일본 디자인 스튜디오 유마 카노 Yuma Kano가 만든 포레스트뱅크 ForestBank는 버려진 나뭇조각과 가지, 껍질, 잎, 솔방울 등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나무 부산물에 수성 아크릴 레진을 섞은 뒤 굳혀 만든 소재다. 어떤 숲에서 어떤 계절에 수거한 부산물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
목공 공법으로 성형이 가능할 뿐 아니라 단단한 내구성으로 인해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하기 좋은 재료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나무의 부산물을 소각할 때 나오는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어 지속가능성에도 일조한다. 올해 밀라노 알코바 Alcova에서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에서 활동하는 쇼 오타 Sho Ota와 함께 선보인 터치 우드 Touch Wood 전시 또한 이 소재의 연장선. 나무 소재가 지닌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WEB yumakano.com
순환하는 디자인
밀라노 기반의 산업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는 알레산드로 스타빌레 Alessandro Stabile가 순환 경제와 지속가능한 공급망을 도입한 의자 시리즈 오투 OTO(One to One)를 선보였다.
오투 체어는 재료의 선택뿐만 아니라 완전한 지속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해 물류부터 운송까지 모든 생산 단계를 새롭게 구축했다. 해양에서 수거한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조립식 의자를 만들었으며, 생분해 가능한 친환경 패키지에 포장되어 하루 안에 구매자의 주소지로 직배송된다. 모든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운송과 배출을 절약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안한 것. 이외에도 재활용 원사로 만든 암체어 브레차 Brezza, 모든 재료를 경량화해 에너지 사용률을 줄인 타코 Taco 암체어 등이 있다.
WEB www.alessandrostabile.com
생분해되는 건축자재
도나 레스토랑은 자연적이고 생분해되는 물질을 인테리어 자재로 적극 활용해 친환경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뉴욕 디자이너 마이클 그로스 Michael Groth는 모로코 장인협동조합과 협업해 뉴욕의 웨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도나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총괄했다. 그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구성주의 운동과 예술가 산두 다리 Sandu Darie, 리지아 클라크 Lygia Clark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 레스토랑을 디자인했다. 흰색의 노출된 벽돌 벽면에 습도 조절을 돕는 울 소재의 원형 벽걸이를 달았고, 소나무로 만든 바닥재를 재활용해 테이블을 만들었다. 또 얼룩진 합판은 좌석을 감싸는 벤치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버섯 균사체로 만든 조명을 달아 바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WEB donnanyc.com
가구로 재탄생한 바비의 집
올해 밀란디자인위크 동안 로사나 오를란디에서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열리는 로 플라스틱 프라이즈 전시가 4회를 맞이했다. 버려지고 쓸모가 없어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하고 업사이클링해 새로운 디자인과 가능성을 시험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한곳에 모였다. 그중 유일하게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된 노용원 작가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그는 쓸만하지만 버려진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를 채굴에 비유하며, 쓰레기 수거장에서 찾은 바비 인형집을 해체해 가구로 재해석한 ‘바비 더 뉴 클래식’ 작업을 선보였다. 플라스틱 장난감의 물성으로 인한 양각 패턴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나전칠기, 전통의 부조 기법이 자아내는 장식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WEB www.studioyongwon.com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조명
조명 시리즈 리치노 Rícino는 제품 디자이너 마리아나 라모스 Mariana Ramos와 건축가 히카르도 이네코 Ricardo Innecco에 의해 설립된 디자인 스튜디오 에스튜디오 레인 Estudio Rain이 개발한 천연 조명이다. 2018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천연수지에 대한 두 디자이너의 궁금증에서 비롯되어 오랜 연구 과정 끝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온도 변화에 잘 견디며 자유롭게 성형 가능한 재료인 식물성 피마자 기름이 이 조명의 주원료. 빛에 대항하여 놓였을 때 호박색을 띠는 따스한 빛을 생성해 공간에 은은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여기에 알루미늄 소재의 지지대를 달아 테이블, 벽, 바닥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WEB estudiora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