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프리즈 서울 위크 동안 굉장히 바쁘셨다고요.
프리즈와 키아프를 제외하고도 관련된 전시가 세 개였어요. 예올과 샤넬이 함께한 프로젝트 전시, 호림아트센터에서 열린 <조선 양화> 전시 그리고 프리즈 기간에 글로벌 아트 회사 LVH 창립자인 로랑스 반 하겐 Lawrence van Hagen의 컬렉션 전시가 제 북촌 한옥에서 열렸죠. 제가 프리즈 위원회 멤버라 해외 VIP분들에게 한국의 미학에 대해 설명해야 했는데요. 노먼 포스터도 그중 한 명이었어요. 제가 설계에 참여한 타데우스로팍 갤러리 설립자와도 굉장히 친분이 깊어서 한국에 오셨죠. 무려 30년 만의 한국 방문이라고 하더라고요. 한옥에 대해 저만큼이나 알고 계셔서 참 인상 깊었어요. 현대미술의 큰 흐름 가운데 우리 공예와 철학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정말 감사하고 의미 있는 한 주였습니다.예올×샤넬 프로젝트 전시 <우보만리 : 순백을 향한 오랜 걸음> 전시의 총괄 및 작품 협업에 참여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이었나요?
지난해 예올 20주년 특별 전시를 총괄한 인연으로 올해 예올×샤넬 프로젝트의 총기획자를 맡게 됐어요. 전체적인 전시 구성부터 주제, 작가 선정에도 참여했죠. 선정된 작가들의 작업을 면밀히 검토하고 동시대성을 가질 수 있도록 장인들에게 디자인을 제안했어요. 초기 전시 기획 단계에는 정말 많은 전문가가 참여했는데요. 저도 그분들 앞에서 최소 다섯 차례나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작품의 렌더링을 보여주며 디자인을 왜 바꿨는지,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지, 이 전시를 통해 어떤 장르를 개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한 거죠.올해의 장인으로 화각장 한기덕과 젊은 공예인에 김동준 도자 공예가가 선정됐죠?
화각 공예는 소뿔을 얇게 갈아 그 위에 오방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통 기법인데요. 저희는 색채를 다 빼고 담백하게 가는 걸 제안했어요. 아마 장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미완성의 상태처럼 느끼셨을 거예요. 일반적으로 소뿔에는 패턴이 있는데, 화각 공예에서는 패턴을 제외한 하얀 부분만 사용해요. 저희는 소의 성장통을 담은 패턴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림보다는 화각 자체의 물성에 포커스를 맞춰봤어요. 대신 옻칠과 먹칠로 음영을 더했죠. 조명, 사이드 테이블, 장, 함, 도시락통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어요.한평생 같은 작업을 이어온 장인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는 거라 장인들이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세요. 저희가 물론 그걸 강요할 수는 없죠. 한기덕 장인은 중간에 못 하겠다고까지 하셨는데, 다행히 전시 오픈날 화각에 새로운 장르가 개척됐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모든 작품이 완판됐고요. 오방색이 없는 화각의 자립, 소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전시라는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았고요. 반대로 젊은 공예인의 작품에는 저희가 전혀 디자인에 관여하지 않아요.호림아트센터에서 11월 30일까지 열리는 <조선 양화> 전시도 무척 인상 깊었어요. 굉장히 입체적이었달까요.
전체 기획은 호림에서, 저희는 공간 기획을 맡았어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암수록>과 <양화소록> 두 권의 원예서에서 전시가 출발해요. 조선인들은 꽃과 나무를 통해 다채로운 창작과 깊이 있는 철학을 만들어냈거든요. 단순히 모양과 색과 그림이 아름다운 도자기를 넘어 그 이면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죠. ‘작은 사물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격물치지 格物致知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걸 아우르는 자연과 우주,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자 노력했는지 방법론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 전시는 현대인들에게 반문하는 전시이기도 해요. 많은 이가 코로나19 동안 나무와 식물을 집에 들이곤 했잖아요. 그것들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는 사고를 했냐는 거죠.이스턴에디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최근 LA에 새로운 쇼룸을 오픈하셨죠?
너무나 감사하게도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요. 저희 스튜디오가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AD)’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100대 디자이너에 선정되어서 그 타이틀 덕분에도 많은 분이 찾아주세요. 전 세계의 취향 좋은 사람들도 우리 한국의 미학과 미감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이스턴에디션은 가구를 통해 늘 새로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것 같아요.
앞에 놓인 이 이스턴에디션 테이블도 한국 전통 소반과 목가구에 쓰인 물림이라는 기법 등을 동시대적인 소재로 표현한 디자인이에요. 곧 컵을 출시하는데요. 주위에 널린 게 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국 도자 역사와 우수성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아쉽더라고요. 토기, 도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담은 네 개의 도자 컵 세트를 만들었어요.최근 장 미셸 오토니엘 작품을 들이셨다고 들었어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컬렉팅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오토니엘은 덕수궁 전시를 계기로 연이 닿았는데, 감사하게도 커미션 작품을 받게 됐어요. 컬러도 제안을 해주었죠. 저는 자신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보고 싶은 거만 보거든요. 미술을 통해 그 시선이 확장됨을 느껴요. 제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인지하지 못했던 가치를요. 위대한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하나의 컬렉션을 들일 때마다 제 작업물이 바뀜을 느껴요. 저의 마음과 의식의 확장을 위해 컬렉팅하고 있어요. 그래서 작품을 들이기 전에 작가의 철학과 세계관을 알려고 노력하죠.이렇게 바쁘게 지내는데, 번아웃은 없으세요?
없어요. 왜냐하면 저의 미션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21세기 서울, 한국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이제는 태오양 스튜디오가 한국의 전통성을 자원화해서 미래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은 조금 인지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마치 한옥을 재현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였거든요. 왜 집에서 한복 안 입고 있냐고 물어보시기도 했으니까요. 일본은 와비사비와 젠 Zen이 있어요. 철학에 가까운 미학을 공간에 대입한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고, 일본은 그 문화에 편승해서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고 있어요. 저는 사실 한국에도 그런 문화를 만드는 것이 다음 세대와 디자이너를 위해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고민을 많이 해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과정이 디자이너한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이다라는 걸 알았으니 그 이후에는 그걸 시각화하고 잘 정리하는 데 5년에서 10년이 걸리지 않을까요?결국 모두 한 결이네요.
맞아요. 공간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가구도 하고, 화장품(이스라이브러리)도 하고, 향수(시낭)도 하냐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요.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에서는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프로젝트를 셀렉트할 때 그 기준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근데 종종 프로젝트를 가린다는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죠. 그래서 사적인 프로젝트는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기업에도 제 방향성에 대해 설명하면 다들 이해해주세요. 공간을 예쁘게 만드는 건 당연하고, 사람들에게 공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무엇을 전달할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진정성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죠.조심스러운 질문인데, 왜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 디자이너나 건축가가 없을까요?
승효상 선생님이나 원오원의 최욱 소장님 등 실력으로 말이 필요 없는 분이 많거든요. 저희 윗세대만 해도 자신을 드러내는 건축가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겸손한 덕목, 자신을 낮추는 자세 때문에 덜 알려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의 작업을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거든요. 앞으로 점차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하반기 계획이 궁금하네요.
곧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파인드 디자인 페어에서 특강이 있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디자인 학교에서 특강과 워크숍이 있어요. 스위스 대사관에서도 디자인 토크가 있고요. 9월 하반기에는 제가 총괄하는 서울뷰티위크도 열리고요. 11월에는 아트부산에서 개최하는 아트 페어인 디파인 서울도 열려요. 그 사이사이에 공간 프로젝트 여덟 개가 함께 돌아가고 있고요. 번아웃이 올 틈이 없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