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공간을 고치고 매만져온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경옥. 그는 올해 칠순을 맞이해서 책 한 권을 냈다. 한동안 미뤄둔 ‘집’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서.
신경옥은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 불린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생겼을까? 리빙 매거진이 부흥기를 맞으며 스타일리스트의 활동이 늘어나고, 라이프스타일이 중요해지면서 인테리어가 일상이 된 지금. 그의 커리어는 그 흐름과 함께 흘러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 시작은 자신의 집을 꾸미는 일이었다. 직접 꾸민 신혼 집의 독특한 창문 디자인을 보고 연락한 기자 덕에 스타일리스트 일을 하게 되었다. 잡지에 실린 집을 계기로 남들의 공간을 꾸며주게 되었고, 좋아서 혼자 하던 일은 어느새 남을 위해 일하는 업이 되었다. 그렇게 신경옥은 40년 가까이 공간을 통해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신경옥 스타일을 촘촘하게 집약한 책 <작은 집이 좋아> 이후 10여 년 간의 행보를 담은 새 책의 제목은 <집으로부터>.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 시작했어요.” 책이 나올 때마다 사실은 내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던 그가 이번에는 꼭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담당자가 초안을 가지고 왔는데, 후루룩 읽다 보니 어쩐지 출판사 식구들의 러브레터를 받은 느낌이었어요. 새 책이 나오기까지 몇 해가 지났으니 그 사이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결국엔 지금 이 시기에 나오려 그랬던 것 같아요. 마치 내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한동안 쌓여 있던 수많은 작업 공간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건 그들이라 가능했습니다. 내가 스타일리스트로 일할 때부터 함께 일해온 사이였으니까. 뭐 그리 대단하진 않아도 나와 내 공간을 이렇게 깊은 속까지 세세히 알고 있는 이는 그들밖에 없거든요.” 평소에도 말을 먼저 꺼내는 법이 없고, 무엇이든 설명하기를 꺼리는 그가 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책에 실린 작업실 모습이 조금 바뀌었어요.
한동안 지하층을 작업실로 사용했는데 지난해 여름부터 3, 4층도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여기가 살림집이었는데, 침대 빼내고 문을 하나로 만든 거 말고는 바뀐 게 별로 없어요. 직원들이 일할 큰 테이블 하나, 회의하고 밥 먹을 큰 테이블 하나 놔야겠다는 생각에 만들었지요. 공간이 너무 하얗기만 하면 재미없으니, 오랜만에 블랙 테이블을 만들었어요.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며 일하고, 일하는 공간이라도 마음 편한 집 같았으면 해서 4층은 쉬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졸리면 올라와서 잠도 좀 자고 멍도 때리고 영화도 보고 하라고요. 지하에는 테이블 세 개를 합쳐서 어떤 작업이든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뒀지요. 그림도 그리고 재봉도 하고 뭐든 쉽게 만들라고. 그랬더니 막내 직원 주현이가 이제는 여기 오면 고향집 온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내심 행복했습니다.
작업실의 가구나 소품은 모두 자체 제작한 건가요?
요즘은 물건들이 잘 만들어져 나와 기성품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지만, 그런 건 재미없잖아요? 무엇보다 내 공간이니까 내가 만들어보고 싶던 거 다 만들어보고 여기에 두는 거예요. 여기서 테스트해봐야 남의 공간에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좀 엉망인 것도 있어요. 하지만 다 애정이 가죠. 이건 이러려고 만들었지, 저건 만들다 고생 좀 했지, 이런 저런 기억이 떠올라 공간이랑 더 친해져요. 잘 빠진 디자인의 가구도 좋지만, 그것만으론 어쩐지 공간이 좀 딱딱해지고 재미없어요. 그러면 일할 때 긴장하게 되는 것 같고요. 안 그래도 일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일하는 공간만큼은 집처럼 편안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지금의 작업실도 집으로부터 온 거네요. 집은 신경옥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하루는 미술치료 공부 하던 딸이 초기 기억화라는 걸 그려보라고 했어요. 최초 기억을 그려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옛날 어릴 때 살던 집을 그렸어요. 기억이 생생하게 나서 하나하나 아주 자세하게 그리게 되더라고요. 다 그리고 보니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공간과 똑같은 거예요.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그 집에 살던 때가 정말 행복했는데, 새로운 공간을 만들 때마다 그것을 다시 재현하고 있는 거래요. 딸아이 해석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신기했어요. ‘집은 내 원천이구나. 내 공간의 모든 게 그 집에서 시작했구나’ 했습니다.
어떤 집이었나요?
아주 옛날이었으니 적산가옥 구조였는데, 매일 흙장난하며 놀던 조그마한 마당이 있고 방이 세 개 있었어요. 부뚜막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엄마가 매일 밥을 짓던 것이 생각나요. 앞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고요. 뭐 지금 집들처럼 예뻤겠어요? 그때 거기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행복한 시간이 제게 공간의 따뜻함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그때 공간에 대한 감각도 생긴 것 같고요.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군요. 집에서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나 규칙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해요.
특별한 규칙은 없지만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해요. 예쁜데 왠지 불편한 의자라든지, 감촉이 좋지 않은 패브릭이라든지, 세탁하기 어려워 오랫동안 더러워진 커튼. 뭐 그런 것들이죠.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도 가끔 눈에 거슬려요. 저 가구나 물건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나 고민하면서. 가끔은 못생겨도 나와 내 가족이 편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면 눈감아주기도 합니다. 예쁘게만 하고 살려면 그게 강박이 되고 불편해지거든요. 나와 내 가족이 불편해지지 않는 것, 그게 규칙이라면 규칙이겠네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집을 만드는 게 진짜 집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런 집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조언해주시면?
나는 좀 내 마음대로라 정답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는데, 결국 답은 집에 있는 것 같아요. 내 집, 내가 가장 편하게 기대고 쉴 수 있는 집이죠.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이 있잖아요. 공간 일을 오래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친밀하게 만나게 됐는데, 결국에는 자신에게 편안한 공간미를 찾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아름다운 것을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깨끗한 것을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흩어지고 복잡한 게 편한 사람도 있고요. 그러니 천편일률적으로 남이 좋다는 것만 하지 말고 내가 편한 게 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공간에 대한 즐거운 감각이 키워지지 않을까요? 이번 책에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팁을 좀 담아봤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편한 집은 어떤 집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질문과 답변을 몇 개 주고받는 사이에도 신경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의 나무와 화분을 매만졌다. “내가 가만히 못 있어요. 사실 여기 작업실도 직원들만 왔다 갔다 하지 나는 거의 나오지 않아요. 별로 올 필요도 없거든요. 직원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요.” 하지만 인터뷰하는 동안 끊임없이 물건들을 옮기고 식물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공간이란 어쩌면 애정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경옥이 집을 생각하는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