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62회째를 맞이한 살로네 델 모빌레. 밀라노 시내 곳곳에서 펼쳐지는 디자인 축제의 장, 푸오리살로네에서 발견한 30가지 하이라이트 장면을 모았다.
알레시의 신전
당장이라도 알을 깨고 부화할 듯한 대형 조형물이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알레시의 전시 공간이다. 로스앤젤레스에 기반을 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플레이랩 PlayLab이 구상한 <신화는 믿음을 만든다 Myth Makes Belief> 전시는 현실과 신화가 공존하며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전시에는 마이클 아나스타시아데스, 사미로 유노키 Samiro Yunoki, 후카사와 나오토 Fukasawa Naoto, 넨도의 오키 사토가 알레시와 협업해 만든 네 가지 신규 프로젝트 컬렉션도 함께했다.
Design Universe
매년 예상을 벗어나는 장소에서 등장하며 큰 놀라움을 안기는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는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서 일곱 번째 문을 열었다. 밀라노 지역의 상징적인 빌라인 빌라 보르사니 Villa Borsani와 빌라 바가티 발레키 Villa Bagatti Valecchi가 이들의 무대가 되었다. 특히 1945년 완공된 빌라 보르사니는 오스발도 보르사니 Osvaldo Borsani가 설계한 현대주의 건축과 푸른 정원, 조각가 루초 폰타나 Lucio Fontana가 디자인한 벽난로 등 독특한 특징을 품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빌라 바가티 발레키는 밀라노의 귀족 가문을 위한 여름 휴양지로 설계되어 롬바르디아 지역의 19세기 빌라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자리한다. 알코바를 통해 앞으로의 디자인 신을 이끌어갈 신흥강자를 발견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년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알코바는 올해 역시 신중하게 선별한 실험적인 디자이너와 브랜드 70여 곳을 소개했다. 저명한 디자이너들과 주요 브랜드부터 떠오르는 신규 브랜드와 전 세계 젊은 인재까지 디자인의 미래에 대한 공통적인 목표를 가진 이들의 광범위한 작품을 선보이며 무한한 영감을 안겼다.
Edra Outdoor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유명한 마시모 모로치 Massimo Morozzi의 지휘 아래 신선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가구 브랜드 에드라 Edra는 팔라초 두리니 Palazzo Durini로 관람객을 초대했다. 기존 에드라의 상설 전시장으로 운영된 이 건물은 이번 디자인 위크를 맞이해 피아노 노빌레 (메인 거실 및 침실 등 팔라초의 메인 층을 일컫는 건축 용어)로 확장되어 더욱 웅장해진 모습. 싱그러운 풀잎으로 가득한 안뜰에서는 에드라의 아이코닉한 소파 컬렉션인 온 더 록스 On the Rocks, 셰라제이드 Sherazade, 스탠다드 Standard에 실외 환경에도 끄떡없는 소재를 입힌 아웃도어 버전을 공개했다. 이 외에도 야코포 포지니 Jacopo Foggini가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로 만든 리버 샹들리에 컬렉션도 만나볼 수 있었다.
장인이 만든 미로
체코 기반의 유리 제조 브랜드 라스빗 Lasvit이 팔라초 이심바르디 Palazzo Isimbardi에서 야외 유리 설치물 포르타 Porta를 공개했다. 라스빗의 아트디렉터 막심 벨코브스키 Maxim Velcovsky가 창작한 설치 작품으로 대형 유리 패널로 구성된 미로 형식이 특징. 이를 구현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유리 가마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시에는 스웨덴 스튜디오 클라에손 코이비스토 룬 Claesson Koivisto Rune이 빛을 위로 확산시키는 유리 렌즈를 사용해 만든 두 가지 크기의 램프 시리즈 네뷸라 Nebul와 라스빗의 수석 디자이너 마리아 쿨레노바 Maria Culenova가 층층이 겹친 합판과 구리를 사용해 제작한 모듈형 조명을 만나볼 수 있었다.
World of Nari Ward
밀라노 시내를 조금 벗어난 장소에서도 디자인 위크의 열기는 이어졌다. 피렐리 안가르비코카 Pirelli HangarBicocca 갤러리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나리 워드 Nari Ward의 <그라운드 브레이크 Ground Break>전을 개최했다. 그는 사회-역사적 주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익숙한 재료들을 혼합하여 대형 설치물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며 기억, 변형, 정체성, 인종, 사회정의 및 소비문화를 탐구한다. 초기 중요 작품부터 신작까지 그의 30년 이상의 업적을 총망라한 전시를 선보였다. 비디오, 사운드, 퍼포머티브 조각, 설치물을 비롯해 워드의 시간 기반 미디어 작업을 강조한 랄프 레몬 Ralph Lemon의 화려한 안무 작품 <지오그라피 트리올로지 Geography Trilogy>를 위한 대규모 설치물도 함께 전시되었다. 피렐리 안가르비코카 갤러리가 주는 공간적 압도감과 나리 워드의 무한한 예술 세계가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밀란 디자인 위크 기간 중 단연 손에 꼽은 전시 중 하나.
숲 속의 정령
쿠마 켄고 Kuma Kengo는 디자인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일본 문화를 기리는 <코다마, 더 스피릿 오브 포레스트 Kodama, The Spirit of the Forest> 전시를 선보였다. 이 전시는 인테리어 회사 알베드 Albed의 쇼룸에서 열렸는데, 전시의 핵심은 일본 숲 속에 거주하는 신비한 정렬들을 경배하는 거대한 전나무 조각인 ‘코다마 Kodama(木霊)’다. 이 조각은 원래 2018년, 쿠마가 이탈리아의 야외 박물관 아르테 셀라 Arte Sella에서 선보인 전시의 일환으로 고안한 조각 작품이다. 그런 기념비적인 작품을 2024년, 알베드의 쇼룸에서 프로젝트의 개념과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으로 다시 한 번 공개한 것.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알프스를 배경으로 쿠마의 창조적인 건축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가구에 깃든 말의 몸짓
자유로움과 동시에 질서를 가지며 대자연의 열기를 상징하는 말은 언제나 크리스토프 델쿠르를 매료시켰다. 오랜 시간 그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말은 이번 밀란 디자인 위크를 기념해 델쿠르의 신규 컬렉션 ‘꿈속의 말’로 탄생했다. 원초적이고도 변화 무쌍한 아름다움을 지닌 동물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랑 고백이라고 봐도 좋겠다. 델쿠르는 가구에 말의 몸짓을 입힘으로써 감각적이고도 내밀한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했다. 미적인 효과를 절제하고 재봉선을 최소한으로 드러내는 마구 공예의 원칙에 기반해 탄생한 클레 Cle 의자를 비롯해, 옴폭하게 파인 후면을 장식하는 고리가 특징인 에메 Eme 암체어, 무거운 석회암 덩어리가 밧줄과 도르래에 매여 옮겨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디자인한 유고 Ugo 펜던트 조명 등 품격 있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가구를 선보였다.
거리로 나온 호랑이
“밀라노에서 호랑이를 보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상상해보세요!” 이탈리아 텍스타일 브랜드 데다 Dedar는 밀란 디자인 위크를 맞이해 유쾌한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데다의 새로운 자가드 벨벳 컬렉션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주제로 프랑스 안무가이자 무용수, 시각예술가인 술리안 리오스 Sulian Rios가 재미난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 무용수들은 호랑이의 고유한 패턴을 재해석한 벨벳 가면을 쓴 채 호랑이를 상징하는 힘과 우아함을 강조하며 밀라노 시내를 자유롭게 누볐다.
메종 이탈리아의 집
메종 마리끌레르 이탈리아가 밀란 디자인 위크를 맞이해 현대 미술관에서 <라 카사 델 아르키테토 La Casa dell’Architetto> 전시를 열었다.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 본고장 출신답게 전시 장소도 특별했다. 18세기 건축물로 유명한 갤러리 디 아르테 모데르나 Galleria d’Arte Moderna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 이번 전시는 밀라노 기반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프란체스코 로타 Francesco Rota가 총괄을 맡았다. 역사와 예술적 풍취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구 브랜드 리빙 디바니, 포로, 파올라 렌티 등의 가구와 소품이 더해져 현대적인 생활 공간으로 새롭게 재현된 것. 시간을 초월한 멋스러움을 담은 메종 마리끌레르 이탈리아의 전시는 현대 가구와 역사적인 건축의 조화를 보여줬다.
안뜰에 핀 무지개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주방 브랜드 엘리카 Elica가 실험적인 행보를 일삼는 일본 디자인 스튜디오 위 We+와 협업한 전시를 선보였다. 두 브랜드의 합심으로 제작된 대형 설치물 <스트라오디나리아 Straordinaria>는 팔라초 리타의 안뜰을 화려하게 채웠다. 가벼움의 상징인 구름에서 영감받아 공기와 따뜻함을 연상시키는 색조의 흐름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 것. 자연, 아름다움, 무지갯빛 색상이 어우러져 오랜 주방 역사를 가진 엘리카의 새로운 가치를 체험케 했다.
파괴된 나무의 두 번째 생
지난해 7월, 폭풍으로 인해 파괴된 5000그루가 넘는 나무들을 기리는 전시 <세콘드 리페: 10 알베리 페르 10 토템 드 아우토레 Second Life: 10 Alberi per 10 Totem d’autore>가 피아차 산 페들레 Piazza San Fedle 광장에서 열렸다. 디자이너 니콜레타 가티 Nicoleta Gatti가 큐레이션한 이 프로젝트는 밀라노의 공공 녹지 복원을 위한 ‘밀란 포 트리 Milan for Trees’의 기금 모금을 지원하는 목적에서 진행됐다. 이를 위해 모인 10명의 디자이너는 나무의 부활을 상징하는 토템 조각 작품을 만들었고, 야외 광장을 무대 삼아 공개됐다. 전시가 끝난 후 이 토템 작품은 경매를 통해 판매될 것이며, 일부 수익은 도시 녹지 복원을 위해 기부할 계획이다.
역사를 기리는 공공 예술
밀라노 중앙역과 피아차 두카 드 아오스타 Piazza Duca d’Aosta 광장에 심상치 않은 설치 작품이 등장했다. 이는 대규모 공공 예술 프로젝트로 유명한 프랑스 예술가 JR의 <라 나스치타 La Nascita> 작품이다. 초현실적인 암석 지형으로 시간과 장소의 경계를 흐리게 한 이 작품은 1906년 역사상 가장 긴 기차 터널 중 하나인 심플론 Simplon 터널의 개통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JR은 당시 사용된 알프스의 암석들을 알루미늄 패널에 인쇄해 대형 구조물로 설치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시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향후 용도를 바꾸거나 녹여서 재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디자인 거장이 남긴 유산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예술가인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기리는 회고전이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에서 개최됐다. 이번 전시의 제목 <나는 용이다 Io Sono un Drago>는 “나는 예술가의 발, 건축가의 몸, 시인의 꼬리, 디자이너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며 멘디니가 자신을 생물로 묘사한 자화상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전시는 400여 개 작품을 통해 멘디니의 다양한 창작 세계를 조명하며 여섯 가지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경험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멘디니가 카펠리니를 위해 디자인한 푸르스트 안락의자를 비롯해 멘디니의 자화상, 다양한 건축 모형, 급진적 시절이던 1970년대 디자인 작품, 그리고 멘디니가 직접 편집한 잡지의 표지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또한 영화제작자 프란체스카 몰테니 Francesca Molteni가 제작한 멘디니의 삶과 작품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상영되었다.
색의 힘
구글은 색채가 최신 하드웨어 디자인에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실험한 전시 <색채의 이해 Making Sense of Color>를 선보였다. 구글의 하드웨어 디자인 부사장인 아이비 로스 Ivy Ross와 그녀의 디자인 팀이자 연구실인 크로마소닉 Chromasonic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전시는 색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에 대해 탐구했다. 빛과 소리의 상호작용을 통해 감각적으로 연결된 여러 개의 설치 공간은 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줬고, 색이 가진 변혁적인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