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오디오 뮤지엄이 서초구에 문을 열었다. 건축가 쿠마 켄고가 건축 설계를 맡은 오디움이다.
웨스턴 일렉트릭의 기술을 집대성한 대형 극장용 스피커. 도슨트 시간에 의자에 앉아 직접 감상해볼 수 있다.
전시의 끝을 알리는 라운지 공간. 청음에 최적화된 패브릭을 조형적으로 활용해 화려하면서도 드라마틱한 공간이 완성됐다.
금속 파이프로 장식한 오디움의 파사드. 마치 도시의 숲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 Kengo kuma
지난 6월 한적한 청계산 부근에 독특한 파사드를 지닌 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 지하 5층부터 지상 5층까지 약 1만1009㎡ 규모에 알루미늄 파이프 2만 개가 수직으로 건물을 감싼다. 이곳은 1877년 유성기 발명 이후 150년간 오디오 발전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오디오 전문 사립 박물관 오디움 Audeum이다. 빈티지 오디오에 조예가 깊은 KCC 정몽진 회장의 수집품들로 채워졌다. 이곳이 화제가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1920~60년대를 아우르는 엄청난 빈티지 오디오 컬렉션, 두 번째는 이곳을 지은 건축 거장 쿠마 켄고와 전체 브랜딩을 맡은 디자이너 하라 켄야의 협업 때문이다. ‘소리의 체험’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시작으로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 공간인 것. 개관전으로 열린 <정음 (正音) : 소리의 여정>은 ‘좋은 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지난 100년 동안 전쟁 시 선전의 목적부터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도구까지 발전해온 음향기기들을 연대기 순으로 만날 수 있다. 19세기 뮤직박스와 오르골을 시작으로 오리지널 소스에 충실한 하이파이 시스템 오디오, 미국과 유럽의 극장 사운드 시스템을 장악한 웨스턴 일렉트릭과 클랑 필름, 왜곡이 없어 라디오 방송국과 녹음실에서 사용하는 스튜디오 모니터 등이 대표적인 예. 지상 3층에서 시작한 전시는 2층과 1층까지 이어진 뒤 지하 2층에서 끝이 나는데, 이 공간이 또 하나의 백미다. 무려 10만 장의 희귀 LP와 웨스턴 일렉트릭 사의 대표 오디오 시스템이자 대형극장용 오디오 미러포닉 Mirrophonic이 전시된 공간. 청음에 최적화된 패브릭을 자재로 사용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오디움의 비주얼 디자인을 맡은 하라 켄야는 이곳의 이름과 스피커 형태에서 따온 심벌, 사이니지, 조형물 등을 제작했다.
1920년대부터 60년대를 아우르는 빈티지 오디오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뮤지엄 굿즈와 각종 책을 구입할 수 있는 뮤지엄 숍.
웨스턴 일릭트릭 확성기의 초기 모델들. 공공장소에서 거대 관중에게 사람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혼을 특징으로 한다.
핀 실린더가 침처럼 뾰족한 스틸과 접촉하면서 소리를 내는 뮤직 박스들. 19세기 때 연주자 없이 기계의 작동 원리로 연주되는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KCC 정몽진 회장과 건축가 쿠마 켄고의 오랜 대화 끝에 완성된 오디움의 모습.
달팽이 모양의 커브 혼 스피커는 저음을 재생하기에 적합했고, 좁은 영화관에도 최적이었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클랑필름 스피커들.
이곳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하루 5회, 한 타임당 약 25명이 전문 도슨트와 함께 공간을 탐방한다. 오디오의 역사와 소리의 세계에 대해 흥미롭고 다채로운 정보를 들을 수 있다. 매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단 3일간만 문을 여는 탓에 얼마 전에는 예약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자유관람에 비해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바로 소리에 대한 진심 때문이다. 약 90분 동안 각기 다른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사운드를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데,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에 퍼져 흐른다. 심지어 이곳을 운영하는 서전문화재단법인은 그 어떤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 삶의 질적 향상과 문화 예술의 다양성,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답이 그리 멋질 수 없다.
INTERVIEW
건축가 쿠마 켄고 Kuma Kengo
© Kengo kuma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졌는지 궁금하다. 첫 만남 때 그가 수집한 오디오로 음악을 들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훌륭했다. 오디오에 대한 관점이 크게 바뀔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는 지금의 기술로 만들 수 없는, 과거에 만들어진 오디오의 귀중함을 얘기해줬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 1년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기기에 따라 소리와 작동법이 각기 다른 오디오를 경험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오디오와 사운드가 담기는 공간을 연구할 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야 정문이 등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동선을 그렇게 짠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처음 부지를 보았을 때 메인 도로와 후면 도로의 레벨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한국 지형을 나타내는 요소라 생각했다. 본래 지형의 형태를 최대한 느끼면서 건물을 체험할 수 있는 경관을 만들고자 했다. 오디움은 음악을 듣는 박물관이기에 건물에 바로 진입하기보다는 최대한 메인 입구까지의 동선을 확보하고, 천천히 건물을 감상하며 전시를 즐기기 위한 사전 워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디자인만큼이나 시퀀스를 중시한 결과다.
알루미늄 파이프가 파사드부터 내부까지 이어진다. 이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의 숲 같은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무작위로 배치된 여러 굵기의 파이프 덕분에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그림자가 변화를 이룬다. 건물 내부에도 여러 길이의 파이프를 매달았는데, 이는 자연의 무작위성을 나타낸 것이다. 무수한 파이프로 인해 숲처럼 위엄 있는 분위기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 같다.
‘소리’를 주제로 한 공간이다 보니 일반적인 뮤지엄과는 다른 디테일이 숨어 있을 것 같다. 건물 외부가 알루미늄 루버로 강한 마감이라면, 전시실 내부는 우드 루버로 다소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했다. 우드드레이프라 부르는 디테일인데, 여러 두께의 나무 루버로 되어 있어 마치 커튼 주름처럼 입체적이다. 이런 입체적인 벽면 덕분에 소리가 다양한 방향으로 반사되고 확산돼 예쁜 울림을 얻을 수 있는 음향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전자기기가 많다 보니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 처음 소장품을 보았을 때 놀라울 정도로 하나하나가 거대하고 웅장했다. 좋은 소리를 위한 공간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오디오가 돋보일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무엇보다 천장 높이를 일반적인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10m로 기획했다. 천장 마감까지 노출로 해 거대한 오디오가 여러 높낮이로 밸런스 좋게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동이 쉽지 않은 전시품인 만큼 전시실마다 재단측과 수시로 소통하며 배치 계획을 진행했다.
지하 2층의 LP 컬렉션 방은 오리가미 같은 기둥 디테일이 특히 눈에 띄었다. 부드러운 소재의 강렬한 입체 공간을 생각했다. 단순히 패브릭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패브릭을 조형적으로 사용해 이 공간의 테마를 형성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꽃과 같은 형상이 되었지만, 꽃 같은 형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천의 가능성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꽃 형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빛도 다른 곳과는 달리 부드럽게 전달된다. 그 덕분에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공간이 완성됐다.
디자이너 하라 켄야와 몇 차례 협업을 했는데, 이번 협업 과정은 어땠나? 건물 디자인이 모두 확정되고 현장 착공을 할 무렵 명칭을 어떻게 할지 클라이언트 측과 이야기를 나눴다. 도쿄올림픽 경기장과 코미코 아트 뮤지엄, 메이지 신궁뮤지엄 등에서 협업한 하라 켄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흔쾌히 협업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이곳 현장을 함께 둘러보았다. 개인적으로 소리에 관심이 많은 하라 켄야는 바로 업무에 착수했다. 오디오 뮤지엄의 줄임말이자 알기 쉽고 세계적으로 어필하기 쉬운 영문 네이밍, 오디움을 만들어냈다.
관객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느끼고 기억했으면 하나? 오디움은 박물관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은 박물관이다. 시각적 요소뿐만 아니라 소리, 빛, 바람, 향기 등 모든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이곳에서 특별한 치유와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한 서울의 새로운 상징적 장소가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