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모던 디자인의 정수를 담은 르모듈러의 연남동 사옥. 1960~70년대 디자인의 흐름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이곳은 디자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만들어진 가구를 만나볼 수 있다.
Villa de Famille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프랑스 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샤를로트 페리앙. 그녀는 현대적인 삶을 위한 건축과 그 공간 안에 배치된 가구들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했다. 그녀의 방대한 업적 중 하나인 스키 리조트 레작 Les Arc은 1967년부터 20년 이상 진행된 프로젝트다. 가장 먼저 지은 리조트는 Arc 1600의 라 캐스케이드 La Cascade(1969년)인데, 이때 고안된 플라스틱 서랍 달린 수납장을 중심으로 1960~70년대 프랑스의 작은 집을 재현해냈다. 1955년 제작된 달팽이 형태의 세르주무이의 천장 조명, 장 프루베의 기숙사 방에 사용된 벽 조명, 자유로운 형태를 지닌 낮은 테이블, 그리고 피에르 잔느레와 샤를로트 페리앙이 함께 만든 타 부레 스툴 등 건축 디자인 역사에 매우 중요한 획을 그은 디자인 가구가 가득 차 있다.
Space Odyssey
1939년 파리 출생의 디자이너 올리비에 무르그 Olivier Mourgue는 1963년부터 프랑스 가구 제조업체 에어보르네 Airborne와 함께 작업하며 다양한 작품을 출시했다. 그 시기 작업 중 진 Djinn 소파 시리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년)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새빨간 강렬한 색상과 유기적인 형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뒤에 놓인 아름다운 꽃잎을 연상케 하는 플라워 스탠드 조명 역시 올리비에 무르그가 디자인한 것. 다섯 장의 알루미늄 반사판으로 제작되어 부채처럼 접을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 독특하다.
Modular Design
샤를로트 페리앙이 스키 리조트 레작 프로젝트를 위해 고안한 집기형 가구다. 실용적이며 기능적인 목적을 가진 가구로 크기와 평면이 다른 여러 공간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듈형 주방 가구와 바, 다이닝 테이블로 재구성한 공간이다. 가구 형태의 주방은 유리섬유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외 가구들은 알프스에서 자생하고 있는 소나무를 사용해 제작되었다. 빨간 테이블 램프는 피에르 디드로 Pierre Disderot가 1955년 디자인한 조명으로, 데스크 램프로 사용하기에 좋은 높이와 눈의 피로를 덜어줄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우아한 형태와 실용적인 사이즈라 어디에나 놓을 수 있는 아이코닉한 제품이다.
Elegant Staircase
산업디자이너 로제 탈롱 Roger Tallon이 1966년 디자인한 계단이다. 주철을 활용한 디자인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계단을 설계했다. 로제 탈롱은 주철을 가볍고 강한 구조물로 변형해 계단의 단계와 난간을 만들어 사용성과 미학을 동시에 고려한 계단을 제작했다. 계단 구조는 모듈화되어 있어 다양한 공간과 높이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원래 주철로 제작되었지만 1968년부터는 라클로슈 갤러리에서 주조 알루미늄으로 생산되다가 현재는 갤러리 썽투에서 제작되고 있다. 르모듈러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다.
Design Icons
샤를로트 페리앙과 장 푸르베의 협업으로 1950년대 디자인된 S.C.A.L 베드는 사이드 테이블이 장착된 독특한 침대다. 옆에 놓인 옷장은 조립식 가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앙드레 소르네의 1960년대 조립식 빈티지 옷장이다. 이 수납장이 대단한 이유는 아름다운 외모에 앞서 프랑스 최초로 대량생산을 하게 된 조립식 가구라는 점, 대중적이고 실용적이며 간결한 형태로 디자인 역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티제트 Tigettes라는 조립식 기법을 적용해 제작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소재의 변화, 컬러의 변주, 도어의 기하학적 분할, 단순한 형태의 핸들 같은 요소를 적용해 가구를 생산했다. 사진 속 옷장은 마호가니 프레임, 블랙 철재 다리, 6개 투톤 미닫이 도어로 기하학적 장식미가 특히 눈에 띈다. 내부에는 행거와 넉넉한 선반, 그리고 신발을 넣을 수 있도록 철재 그릴 선반이 장착되어 있다. 오른쪽의 플로어 스탠드는 1955년 르네 장 카이에트 René-Jean Caillette가 디자인한 조명이다. 이들은 모두 현대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며 디자인의 혁신성과 미감을 잘 보여준다.
연남동에 위치한 4층 건물의 르모듈러 사옥.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르모듈러의 권희숙 대표는 세르주무이와 디드로 조명을 비롯한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작품을 한국에 소개해오고 있다. 프랑스 디자인 가구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완성한 르모듈러의 사옥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봤다.
프랑스 빈티지 가구와 공간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제가 좋아하고 배운 것은 공간과 가구에 관한 것입니다. 학생 때는 큰돈이 없으니 소품 위주의 디자인 제품을 수집하며 생활 속에 사용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취향을 만들어가는 것이 제 삶의 질도 높여주었으며, 점점 소장 가치가 있는 디자이너들의 가구를 모으게 됐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수집하다 보니 프랑스 디자인만이 갖는 매력을 알게 되었고,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적 미감이 인상적인 피에르 디드로의 노란색 테이블 램프.
이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세르주무이 매장에서 조명과 어울리는 가구 전시를 연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이전부터 프랑스 모던 빈티지 가구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컬렉션해오다가 6년 전부터 세르주무이 조명을 한국에 소개했어요. 조명만이 아닌 1950년대에 시작된 프랑스 모던 가구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세르주무이 매장에서 팝업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첫 전시로 헝꽁트르 Rencontre 전시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헝꽁트르 전시는 프랑스말로 ‘만남’이라는 뜻으로 컬렉트 서울과 함께 기획했습니다. 이 전시 이후 좀 더 다양한 프랑스 가구 디자이너와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르모듈러를 만들었습니다.
연남동에 4층 건물의 사옥을 지으셨어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거처가 필요했어요. 부분적인 리모델링도 생각해봤지만 전체적으로 통일감 있는 공간의 건물이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4층은 우리가 서울에 있는 동안 잠시 머물다 가는 공간으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가구를 보여드리고 또한 우리가 생활에서 사용하면서 누리는 공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빈티지 가구와 조명을 소개해 오고 있는 르모듈러의 권희숙 대표.
1층은 선물가게 형식의 팝업 공간으로 운영된다고 하던데요. 이 공간의 이름은 ‘에스칼리에 Escalier’입니다. 프랑스어로 계단을 뜻하며 여러 가지 브랜드가 모여 다양하고 아름다운 삶의 형태를 제안하는 프로젝트성 공간이 될 거예요. 누구든 팝업에 관심 있는 분이면 자유롭게 팝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층은요? 르모듈러의 가구와 디드로 조명을 소개하는 쇼룸입니다. 르모듈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축가, 실내건축가, 가구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통해 모던하고 혁신적으로 변화되는 생활 방식에 집중하며 그 변화에 앞장선 디자이너들을 존경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3인방 디자이너 외에도 당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디자이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뗌바우하우스, 힌지, 르모듈러가 모여 1층 에스칼리에의 첫 번째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예약제로 운영될 것이라고 하던데요. 이곳의 운영 방식이 궁금합니다. 우리는 가구를 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그 가구가 갖고 있는 스토리와 정신, 그리고 시대 상황에 대한 관심을 함께 이야기하고 방문해주시는 분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워크인으로 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약을 통한 손님과의 만남만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손님 오실 때마다 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프랑스 가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우리도 큰 즐거움을 얻습니다. 워크인으로 오셔서 그냥 눈으로 훑어보기만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이미지 소비에 그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 디자이너를 존경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가구를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싶습니다. 특히 볼륨이 큰 가구 조명 같은 것은 체험하는 데 제약이 많기 때문에 더욱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디자이너 출신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빈티지 입문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가구는 한 번 사면 교환도 어렵고 크기가 있어서 구입할 때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제품입니다. 빈티지는 결국 취향의 문제인데, 예술작품을 구입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타인의 취향이나 유행하는 가구들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한 개의 가구를 구입하더라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방향으로 입문하시면 좋겠습니다. 삶의 방식을 공간 디자인과 생활 가구를 통해 제안하려던 그 시대 디자이너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 파스칼리옹의 제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