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정 대표의 집안은 술 냄새가 풀풀 풍긴다. 아버지는 국산당 창업주인 고 배상면 회장, 오빠는 현 국순당 대표인 배중호 씨, 동생은 배상면주가를 세운 배영호 대표다. 느지막이 시작한 사업이지만, 그녀 역시 전통 탁주를 개발하는 도가를 이끌고 있다. 술 냄새는 분명 술 냄샌데, 그 냄새가 지닌 세월의 내공이 보통 아니다. 좋은 술만이 낼 수 있는 향긋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랄까.
배상면 회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그는 우리나라 술 얘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누룩을 생각한다’는 뜻의 우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을 정도로 전통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대표작은 1991년 개발한 백세주. 이를 통해 국내 전통주 시장의 문이 열렸다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뭐 남의 술 얘기긴 하지만(웃음), 제 결혼식 때 손님이 오면 대접하시겠다 고 아버지가 술을 담그셨거든요. 중국에는 딸을 낳으면 술을 담가서 시집갈 때 들려 보내는 풍습이 있어요. 그것처럼 아버지가 직접 술을 담가서 제 결혼식 때 손님들에게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았던 거죠. 그 술이 상품화된 것이 현재의 백세주예요.”
어릴 적부터 술독 가득한 도가에서 뛰놀던 그녀는 형제들과 달리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술 사업을 시작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내가 약주를 개발하고 연구했지만,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건 막걸리야. 막걸리야말로 우리 민족의 혼이 배어 있는 전통주잖니. 나의 꿈은 막걸리다. 막걸리에서 약주가 나오는 거니까.” 당시 현대건설 지사장이었던 남편을 따라 해외를 돌던 배혜정 대표는 술에 쏟는 일본 장인들의 고뇌와 열정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 터였다. 배 대표가 갖고 있던 생각이 배상면 회장의 뜻과 맞아떨어졌고, 그녀는 아버지의 뜻대로 과감히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일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초기에는 당연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 배혜정도가를 대표하는 ‘부자’는 좌충우돌하던 환경 속에서 탄생한 탁주다. 10여 년 전 경기도 추청미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백하주를 복원했다. 찐 쌀을 사용하는 여타 도가와 달리 생쌀을 발효하여 만든 것이 특징이다.
부자는 사실 지나치게 앞선 술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막걸리는 원주에 물을 섞은 도수 6%의 희석주였다. 하지만 초기의 부자는 16% 원주인데다, 병도 플라스틱이 아닌 유리병을 사용했더랬다. 시장에서의 반응은 당연히 미미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10여 년 전에 출시된 이 술이 작년 ‘우리술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페트병에 술을 팔다 보니 부자를 막걸리로 인정을 안 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페트병에 뭐, 그런 막걸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장인들이 하는 고급화를 하고 싶었던 거죠.” 부자의 개발 배경에 대해 묻자 그녀는 “너무 아무것도 모르면 그림 그리기가 좋다”며, 오히려 “지금 뭔가를 한다면 창조적이고 새로운 것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최근 전통주는 기분 좋은 물살을 타고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전통주 펍이 생겨나고 있고, 주세법의 개정으로 하우스 막걸리를 판매하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배 대표의 의견을 물었다. “음, 좋은 것 같아요. 경쟁은 어쩔 수 없거든요. 그게 나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를 떠나서요. 전통주가 왜 활성화되지 못했는지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게 소비자와의 접점이 너무 낮아서 그렇거든요. 신선한 막걸리를 정겹게 동네 양조장에서 맛볼 수 있으면 좋겠죠. 마치 영국의 펍처럼 친구가 놀러 오면 ‘우리 저 양조장에 가서 술 한잔하자’ 하면서요. 동네 사랑방처럼 되는 것, 그게 가장 좋은 아이디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