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 2005는 역설되고 모순되는 것들이 이루는 조화로움으로 완성되는 샴페인이다. 그 구심에 피노누아가 있다.
유럽의 수도사들이 훌륭한 와인 메이커였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깊은 잠을 털고 일어나 포도밭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성실과 근면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고, 예민하고 까다로운 와인의 숙성 과정을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수도사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피에르 페리뇽 Pierre Pérignon일 것이다. 그는 신의 과업으로 주어진 와인 연구에 기꺼이 일생을 바쳤고, 무엇보다 샴페인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돔 페리뇽 Dom Pérignon이라는 샴페인 걸작에 새겨졌다. 돔 페리뇽은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샴페인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만드는 과정은 묵묵한 헌신과 연구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돔 페리뇽의 와인 메이커 뱅상 샤프롱 Vincent Chaperon을 처음 만난 건 돔 페리뇽의 야심작인 P2 1998 론칭 때였다. 그의 첫인상은 어쩐지 수도사 같았다. 담백한 느낌과 차분한 어투, 돔 페리뇽에 대한 철학과 미학에 대해 얘기할 때의 학구적 분위기 같은 것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 2005의 론칭을 앞두고 샤프롱과 다시 만났다. 돔 페리뇽은 빈티지 샴페인만을 생산한다. 포도 작황이 좋지 않은 해에는 아예 샴페인을 생산하지 않는다. 2005년은 초반에는 날씨가 좋다가 잦은 비와 추운 날씨 때문에 와인 메이커들의 기대감이 한풀 꺾인 해였다. 돔페리뇽 로제 빈티지 2005는 과감하게 선별한 소량의 포도만으로 생산됐다. 유례없이 성숙한 아로마와 품질의 포도 탓에 그 가치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보통 돔 페리뇽 로제를 ‘피노누아에 바치는 헌사’라고 한다. 까다롭고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포도 품종인 피노누아는 다루기 힘든 만큼 최고의 맛을 끌어냈을 때 다른 어떤 품종보다도 복합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샤르도네와 피노누아의 조화를 강조하되, 피노누아의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돔 페리뇽 로제의 제조 과정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 다시 만난 샤프롱과 함께 돔 페리뇽 로제 2005를 맛봤다. 핑크보다는 핏빛 오렌지에 가까운 컬러가 꽤나 관능적인 이 로제 샴페인은 풍미가 다채로웠고, 탄탄한 구조감도 인상적이었다. 한참 뒤에도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향의 놀라운 지속력 역시 매력적이다. 수행자처럼 와인 메이커의 길을 걷고 있는 샤프롱에게 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에 관해 몇 가지를 물었다.
돔 페리뇽 로제를 ‘피노누아에 바치는 헌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듣고 싶다. 돔 페리뇽 로제의 배합은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 피노누아 화이트 와인, 피노누아 레드 와인으로 구성된다. 레드 와인을 통해 통합된 색조와 아로마, 구조적 요소 덕분에 피노누아의 개성이 빛을 발한다. 한편 돔 페리뇽이 품고 있는 포부, 즉 ‘조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도 존중된다.
피노누아는 와인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어려운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피노누아의 어떤 점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노누아가 매력적인 이유가 궁금하다. 피노누아는 재배하기가 까다로운 품종이다. 질병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노누아는 산화에 예민해서 와인으로 제조하기도 까다로운 품종이다. 이 같은 연약함 때문에 피노누아는 복잡하고 변덕스런 특성을 지닌다. 피노누아의 정수를 표현하는 작업은 돔 페리뇽에게 있어 매혹적인 도전 과제다. 그렇기 때문에 피노누아 특유의 개성을 체험하는 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돔 페리뇽 로제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돔 페리뇽 로제는 피노누아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열정적이고 즐거움이 가득하며 영적인 피노누아는 신비롭고 예측불허인 품종이다.
블랑과 비교했을 때 로제 샴페인만의 특성과 매력은? 돔 페리뇽 로제나 블랑 모두 조화라는 같은 철학으로 만들어졌다. 돔 페리뇽 로제는 블렌딩을 하는 데 있어 제3의 요소인 피노누아의 레드 와인을 사용한다. 피노누아의 블렌딩을 통해 컬러와 진한 과일 그리고 구조를 부여한다. 우리의 도전 과제는 피노누아가 더 깊고 높이 울리도록 레드 와인을 블렌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열정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오래 숙성된 샴페인이 갖는 장점은 무엇인가? 숙성 Maturation과 에이징 Ageing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에이징의 핵심은 산화다. 반면 숙성은 하나의 구성 과정이다. 서늘하고 어두운 셀러 안에서 와인과 효모, 산소 사이의 긴밀한 접촉이 돔 페리뇽 병에서 이루어진다. 돔 페리뇽이 가진 에너지와 복잡성은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숙성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다.
빈티지 샴페인을 만들 때의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념할 수 있는 빈티지 샴페인만의 매력이 있을 텐데. 빈티지에 대한 돔 페리뇽의 신념은 단순히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절대적 신념이다. 이렇게 까다롭고 이례적인 기후와 환경의 제약 속에서 빈티지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 과제인 동시에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도전 과제란 돔 페리뇽의 정수를 표현해내는 것이고, 기회란 스스로의 역량을 뛰어넘어 기꺼이 리스크를 감수하며 아슬아슬한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결국 빈티지를 선언하지 못할지라도, 와인의 추가적인 ‘영혼 Soul’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부담이기 때문이다. 돔 페리뇽은 매 빈티지마다 새롭게 재탄생한다. 모든 빈티지는 온전히 새로운 와인이며, 저마다의 스타일과 개성이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나라별로 샴페인 마니아들의 취향과 성향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취향과 선호 사항은 단순히 나라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도 차이가 많다. 산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씁쓸한 맛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100년 전에는 오늘날보다도사주(샴페인의 당도)가 10배나 높은 샴페인이 판매되었다. 그러나 돔 페리뇽처럼 훌륭한 와인은 주류가 가진 기능에 문화적 차원을 더하고자 노력한다. 취향과 선호 사항을 넘어 감성의 원천으로서의 ‘조화’를 달성하려는 것이 돔 페리뇽의 포부다. 나라와 세대, 문화를 초월하여 만남과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작업도 이 같은 감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돔 페리뇽을 특징지을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조화 Harmony’다. 와인 메이커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테루아와 절기를 준수하면서 매년 새롭게 탄생하는 것, 매년 빈티지를 통해 돔 페리뇽 와인이 지닌 미학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 그리고 전통을 수호하고 돔 페리뇽의 비전을 품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