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시장에서 장을 본 뒤 아침을 해먹었다. 그렇게 경험한 베트남의 맛은 또 달랐다.
어쩌면 호치민은 휴가지로 적당한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낭도 나트랑도 아닌 호치민, 그 복잡한 도시. 하지만 룰렛 판을 돌리다 툭 하고 화살을 던지듯 여행지를 골랐고, 그것이 호치민에 맞아떨어졌더랬다. 우연이 만드는 재미는 언제나 기대 이상이었기에 두려움보단 설렘이 앞섰다. ‘동양의 파리’로 불리는 호치민은 프랑스 점령 당시 사이공으로 불리며 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했고, 프랑스 건축양식을 답습한 건물이 도심 곳곳에 즐비하며…. 가이드북을 10페이지쯤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직접 경험하면 될 일이었다. 비행기에 올라 기내 영화를 두 편쯤 보고 나니 공기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져 있었다.
도착과 동시에 호치민의 미식을 흩으며 쏘다녔다. 포 레 Pho Le나 포 호아 파스티유 Pho Hoa Pasteur, 포 24 Pho 24 등 다양한 면면의 쌀국수를 도장 깨기하듯 먹어치웠다. 프랑스인들이 멋스럽게 담배를 태우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토끼 고기에 와인도 마셨다. 앤티크 거리를 헤매다 발견한 취향의 카페에서 연유를 넣은 베트남 커피 ‘카페 쓰어다’를 홀짝였고, 도시가 지겨워진 어느 날엔 로컬 여행사의 프로그램을 신청해 일일 메콩 강 투어를 다녀오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수상시장도 구경하고, 라이스 페이퍼와 전통주를 만드는 원주민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했다. 쿠킹 클래스에 등록해 현지인 셰프에게 베트남 요리를 배우기도 했으며, 오토바이가 민족 대이동을 하는 도로 한 켠에 앉아 껌승이니 분팃느엉 같은 스트리트 푸드를 먹는 날도 있었다. 그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도시의 경관은 또 다르더라.
하지만 정작 이번 여행의 버킷리스트는 따로 있었다. 너무 사소해서 좀 쑥스럽지만, 요리가 하고 싶었다. 갓 시장에 나온 신선한 베트남 식재료를 정성껏 다듬어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하는 일. 그건 베트남의 미식을 맛보는 또 다른 방법일 것 같았다. 숙소를 에어비앤비로 구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창을 내다보면 커다란 잎사귀에 드리워진 정원이, 또 다른 창으로 내려다보면 고즈넉한 신사가 있는 아름다운 집에 머물렀는데(곳곳에서 노리개 같은 아이 물건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신혼부부의 집이었던 것 같다), 그 한 켠에 언제든 마음껏 쓸 수 있는 주방이 있었다. 드디어 실행의 날이 왔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노인처럼 설잠에서 깬 새벽, 슬쩍 에코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전날 눈여겨봐둔 로컬 시장이 있었기에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새벽 6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도 그곳은 시장다웠다. 노점에서는 멜라민 그릇에 밤새 푹 고은 고기 국물과 퍼, 향신채를 담아 나르는 손길이 바빴고, 출근 전의 베트남 사람들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열심히 쌀국수를 먹었다. 반쎄오, 반꾸온, 분팃느엉처럼 익숙치 않은 베트남 음식도 거리에 즐비했다. 특히 색색의 식재료는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베트남은 일조량과 강수량이 풍부한 열대 몬순 기후다.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것은 물론이요, 1년에 3모작을 하기 때문에 쌀이 넘쳐난다.
아이러니하지만, 천 년이 넘는 중국과 프랑스로부터의 식민지배 때문에 미식의 수준도 높다. 그것은 시장에서 파는 재료의 다양성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육점에서는 삼겹살이나 목살처럼 획일화된 부위가 아닌 돼지의 뇌, 젖꼭지처럼 ‘정말 이것도 먹는 거야?’ 싶은 부위가 거침없이 진열되어 있고, 가게에서 파는 달걀도 그 종류와 크기가 훨씬 다양했다. 채소 가게에서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쿨란트로, 마디풀, 레몬그라스, 딜, 시소, 타이 바질 등의 다양한 허브와 채소류, 용과, 망고스틴, 두리안 등의 다양한 열대과일이 빛을 발했다. 아침에 갓 잡아온 듯 싱싱한 생선은 가판대에서 몸을 뒤틀다 바닥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무엇을 만들지 딱히 정하지 않았기에(쿠킹 클래스에서 배운 것은 꽤 전문적이라 시도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쇼핑을 했다. 일단 맛의 기본이 되는 다진 마늘과 양파, 타이 고추, 셜롯을 집었다. 오크라뿐 아니라 이름 모를 버섯과 항상 냉동으로만 맛보던 줄기콩, 한국에서는 비싸서 마음 놓고 먹지 못했던 딜도 한 단 넣었다. 네모난 바구니에 채소를 담은 뒤 저울에 올리면 킬로그램당 돈을 내는 시스템인 듯 보였다. 에디터가 알아듣든 말든 계속 베트남어로 말을 걸던 아주머니는 이내 체념한 듯, 내야 할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1만8천동. 비닐봉지가 묵직할 정도로 장을 보았는데도 한화로 1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역시나 베트남어로 아침 인사를 하는 에어비앤비 관리인 아주머니를 지나쳐 주방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남의 공간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곳곳에 숨어 있는 팬과 도마, 칼을 찾아냈다. 흐르는 물에 꼼꼼히, 정성껏 채소를 씻었다. 나무 도마에 식재료를 썰 때 통통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팬에 식용유를 두른 뒤 매콤한 타이 고추와 마늘을 넣어 향을 냈다. 재빨리 양파와 오크라, 버섯을 순차적으로 넣어 볶았다. 지글지글 끓던 팬에서 채소의 수분이 빠져나오기 시작했을 때 슬쩍 버섯을 집어 맛을 보았다. 재료가 워낙 좋다 보니 그 자체로도 맛있었지만, 왠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때,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느억맘 소스가 들어왔다. 느억맘은 작은 생선을 발효시켜 만든 베트남의 어장으로, 국물에 넣어 감칠맛을 내거나 소금 대신 쓰는 등 각종 요리에 마구 뿌려대는, 일종의 만능장 같은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 살짝 수저에 따른 뒤 팬에 흩뿌렸다. 마지막으로 딜을 손으로 거칠게 찢어 넣은 뒤 재빨리 숨을 죽여 불을 껐다. 꽤 그럴싸한 냄새가 주방 곳곳에 퍼졌다. 냉장고에 시원하게 넣어둔 코코넛 주스를 투명한 잔에 따르고, 예쁜 접시를 골라 후식으로 먹을 망고스틴도 담았다. 창밖에서는 이름 모를 새가 한숨을 쉬듯 울었고, 하늘의 구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창밖에 펼쳐지는 호치민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현지에서 키운 다양한 식재료를 한입에 넣고 우물대니, 이것이 또 베트남의 다른 맛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