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최대의 주방&욕실 박람회인 KBIS에 다녀왔다. 미국의 빌트인 주방 가전 데이코는 단순히 스마트한 제품을 넘어 하나의 럭셔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메종&오브제를 비롯해 세상에는 유명한 박람회가 많다. 박람회가 어떤 곳인가.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물건을 깡그리 갖고 나와 뽐내는 자리 아닌가. 번득이는 개발자들의 아이디어를 훑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초 단위로 터져나온다. 지난 1월 9일부터 3일간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KBIS(The Kitchen&Bath Industry Show)에서도 그랬다. KBIS는 전 세계 2500여 업체가 참여하고 13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주방&욕실 업계의 매머드급 박람회다. 전 세계 주방&욕실 관련 업체가 저마다 자랑거리를 들고 모여든 만큼, 가장 트렌디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제품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박람회를 둘러본 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주방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지? 약간의 조미료를 보태 말하자면, 주방은 거실을 앞질러 가족의 소통을 이끄는 핵심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푸드 에디터라고 주방을 편애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솔직히 따져보자. 전통적으로 가족의 소통을 위해 존재했던 거실은 딱히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하는 일이라곤 함께 TV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는 편안한 소파에, 누군가는 폭신한 러그에 자리를 잡았지만 단지 묵묵히 TV를 보았다. 소통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얕은 웃음과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그런데 주방은 다르다. 주방에서는 가족들이 함께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하고 그것을 먹고 나누며 이야기를 한다. 아름다운 정원과 식탁, 요리가 있지 않아도 분명 소통을 한다. 그리고 그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KBIS에 참여한 많은 브랜드는 사물인터넷이라는 기술을 들고 나왔다.
사물인터넷? 쉬운 두 단어를 붙여놓으니 꽤 어려운 말처럼 보인다. 사물인터넷은 다양한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시켜 원격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뜻한다. 영어인 ‘Internet of Things’의 앞 글자만을 따서 IoT라고도 부른다. 더욱 쉬운 예를 들어보자. 기상 시간에 맞춰 커튼이 열리고, 커피포트와 토스터가 나의 취향을 분석해서 알아서 아침을 준비한다. 마치 어릴 적 보았던 SF영화에서처럼 사물인터넷은 그렇게 멋진 삶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다. 사물인터넷으로 업그레이드된 주방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서툰 솜씨로 스테이크를 굽다가 태워 속상해할 필요도 없다(아마 사물인터넷으로 매뉴얼화된 레시피가 육즙이 주르륵 흐르는 스테이크를 완성시킬 것이다). 유통기한을 깜빡해 아까운 식재료를 버릴 일도 없다(마치 비서처럼 식재료의 임박한 유통기간을 알려줄 것이다). 사물인터넷은 이처럼 소통을 돕는 핵심 기술이 되어 삶의 질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기술을 넘어 예술로
사물인터넷의 개발에 주력하는 브랜드 중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빌트인 주방 가전 브랜드인 데이코였다. “제품이 좋은 건 너무나 당연해요.” 데이코의 민은주 상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핵심이 담겨 있었다. 제품이 좋은 것은 기본이다. 삼성의 기술력과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업계의 노하우를 지닌 데이코는 기술 이상의 것, 바로 빌트인 주방 가전 시장의 ‘럭셔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잠시 데이코가 어떤 기업인지 살펴보자. 1965년부터 미국의 고급 빌트인 주방 가전을 만들어온 데이코는 50년간 3대째 가족 경영으로 운영해왔다. 업계의 권위 있는 상으로 손꼽히는 ‘굿 디자인 키친&바스 인더스트리 쇼’에서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받는 등 럭셔리 주방 가전 시장에서 꾸준히 인지도도 쌓았다. 그런 데이코를 지난 2016년에 삼성전자가 인수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대체 왜? “바로 삼성의 기술력과 데이코의 노하우가 만난 거죠.” 삼성전자의 부민혁 상무가 확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최초의 결과물이 바로 모더니스트 컬렉션이다. 삼성과 데이코의 합작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간 끈끈하게 붙어 있던 기존 스타일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요소를 더해가며 럭셔리 키친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전자 전문 매체인 트와이스 TWICE는 ‘2017 VIP 어워드’에 데이코의 오븐 · 레인지 · 쿡탑을, 미국의 유명 건축 디자인 매거진인 <AD(Architectural Digest)>는 ‘Great Design Award 2017’에 데이코의 가스 쿡톱을 선정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블랑
데이코의 지향점을 한번에 파악하고 싶다면, 모더니스트 컬렉션의 포슬린 냉장고인 ‘프로젝트 블랑’을 살펴보면 된다. “데이코의 타깃은 수입이 기본 25만 달러 이상인 부유층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주로 홀푸드 마켓 Wholefood Market 같은 오가닉 마켓에서 장을 보죠. 그런데 오가닉 제품만 사면 뭐하나요? 그 좋은 식재료를 하얀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냉장고에 넣잖아요.” 데이코의 민은주 상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럭셔리 빌트인 키친이라면 그에 걸맞는 오가닉 스토리지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이에 차용한 소재가 바로 포슬린 Porcelain이다. 흙을 빚은 뒤 구워 만든 백색의 자기를 뜻하는 포슬린은 냄새가 배지 않고 매우 위생적이다. 또한 일반 냉각 소재보다 열용량이 높아 온도 변화를 최소화할 수 있다. 플라스틱보다 5배나 단단하며, 표면에 기공이 없어 아무리 오래 써도 변색되지 않고 하얗다. 백색을 뜻하는 불어 ‘블랑 Blanc’을 넣어 프로젝트 블랑 Project Blanc이라 이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50년 전, 미국의 한 냉장고 회사에서 포슬린 소재를 사용한 적도 있었대요. 그런데 너무 무거워서 설치할 때마다 깨지는 거예요. 결국 오래갈 수 없었죠. 하지만 데이코의 포슬린은 얇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강해요. 삼성의 기술력이 더해졌거든요. 방탄복 제작에 사용되는 섬유를 포슬린 뒤에 덧댔는데, 이는 시중의 강화유리보다도 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데이코의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냉장고 내부에 포슬린이라는 오가닉 소재를 차용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어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유명 그릇 브랜드처럼 하얀 포슬린에 신비로운 푸른색 염료로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데이코는 그 터프한 그림을 구현시켜줄 아티스트를 찾아 헤맸고, 마침내 세라믹 아티스트인 앤 아지 Ann Agee와의 콜라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 블랑 안에 그려진 아름다운 푸른색 그림은 앤 아지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첫 작품이다.
뉴 럭셔리 키친
랄프로렌이 구축한 과거 미국의 부유층과는 달리 뉴 럭셔리를 이끄는 신흥 부유층은 자신의 부를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더해주는 사람과 물건을 사랑하며 실험정신이 뛰어나고 환경 친화적이다. 디자인과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타인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주는 서비스와 상품에 큰 가치를 둔다. 하이엔드 럭셔리 주방 가전을 선보이는 데이코는 오직 소수의 사람을 위해 그에 걸맞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왜, 자동차를 살 때도 대시보드부터 모두 다 고를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주방 가전도 완전히 커스터마이징하는 거죠. 왜 그렇게 하느냐, 희소성이 필요하거든요. 희소성을 강조한 럭셔리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예요. 옷을 사러 가서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수량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물었는데 다섯 개면 사잖아요. 스무 개면 안 삽니다.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민은주 상무가 덧붙였다. 데이코의 홈페이지에 가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문구는 ‘It’s time to remodel the kitchen(주방을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이다)’이다. 데이코가 새롭게 선보일 럭셔리 빌트인 키친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막 그 발을 내디뎠으니, 이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아름답고도 소장 가치 높은 럭셔리 주방 가전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