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전각의 기와 지붕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원서동 끝자락. 앤디앤뎁 윤원정 상무의 새로운 주방이자 일터, 비스트로 데비스가 문을 열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석원 대표와 함께 패션 브랜드 앤디앤뎁을 이끌어온 윤원정 상무. 하루아침에 유행이 변모하는 변화무쌍한 한국 패션계에서 묵묵히 걸어온 발자취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현재 운영 중인 앤디앤뎁의 매장 수는 20여 곳. 패션 디자이너로 본업에 충실했던 윤원정 상무는 또 다른 자아인 ‘부캐’에도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1996년 미국에서 차린 부부의 신혼집은 늘 친구들로 북적는데, 식탁에는 언제나 그가 손수 만든 요리들이 올랐다. 20대 시절을 보낸 뉴욕에서 여러 나라의 음식을 접했고, 늘 새로운 맛과 풍미를 탐닉했다. 한국에 정착한 뒤 패션 위크 출장 차 찾은 파리 아파트먼트 숙소에서도 그는 꽤 오랫동안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홈메이드 요리를 맛본 후배들은 #데비스키친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맛깔스러운 음식과 어우러지는 근사한 테이블 세팅, 사람들은 그가 만든 음식과 그릇, 소품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 시점에는 제 SNS 피드가 온통 음식 사진뿐이더라고요(웃음). 몇 년 전에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계정(@debbieskitchen_official)을 만들어야 했어요. 주말에 집에서 만든 메뉴들의 레시피를 올리거나 쿠킹 팁을 공유하는데, 나중에서야 제가 패션 디자이너인 걸 알게 된 분들도 있어요.”
하나, 둘 쌓인 사진과 게시물은 그의 부캐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2016년 <메종> 5월 호에도 부부의 친구들인 패션 스타일리스트 한혜연과 김성일,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태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2023년 여름, 창덕궁 담장을 면한 창덕궁길에 브런치 비스트로 데비스를 오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공간은 원래 1968년에 지어진 양옥집이었어요. 쭉 주거용으로 사용하다 처음 매물로 나왔는데, 궁궐 뷰에 반해서 30분 만에 덜컥 계약을 해버렸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을 앤디앤뎁의 오프라인 접점을 늘리고자 살롱처럼 활용할 계획이었는데, 볼수록 공간이 아깝더라고요. 더 많은 분이 이곳의 경치와 운치를 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데비스 키친의 확장판을 생각하게 된 거죠.”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할 무렵 시작된 공사는 5월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리모델링 공사는 다운타우너, 노티드 등 다수의 식음 공간 프로젝트를 경험한 코발트 스튜디오가 맡았다. 그가 바랐던 리모델링의 방향은 총 세 가지였는데, 먼저 오래된 집의 정취를 잘 살려줄 것. 둘째, 라꼬르뉴 오븐이 있는 오픈 주방을 만들어줄 것. 셋째,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잘 어우러진 분위기일 것.
“어슴푸레하게 해 질 무렵 이 길을 걷다 보니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르는 거예요. 택시를 타면 1920년대 경성이나 1600년대 조선 시대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바깥 풍경이 굉장히 한국적이라 내부 공간만은 오래전 유럽에서 건너온 뉴욕의 비스트로 같은 분위기면 좋겠다 싶었죠.” 리모델링 과정에서는 벽과 타일, 소파 같은 소품 하나까지 섬세하게 그의 손이 닿았다. 1층의 벽은 바닐라 컬러의 벽에 청록색 벨벳 소파로 포인트를 주었고, 2층은 창 너머 보이는 창덕궁의 누각색에서 따온 민트 컬러로 벽을 칠했다. 기존에 있던 나무 소재 계단과 난간, 천장, 벽 패널, 문, 찬장 등 살릴 수 있는 요소는 최대한 살려 아늑한 집의 분위기를 더했다. 메뉴를 구성하는 일 또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마치 패션쇼의 흐름을 짜듯 메뉴를 하나씩 잡아 나갔다. 레스토랑에서 조리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정량화하는 과정은 부산 달맞이고개에 자리한 프라이빗 레스토랑 차경의 조마리아 오너 셰프의 도움을 받았다.
“저희 집에 손님을 초대할 때 만들었던 메뉴들을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주로 브런치와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들이죠.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든 홈메이드 요리를 알아봐주시는 것 같아요. 집에서 쓰던 르크루제 냄비도 다 가지고 왔거든요(웃음). 앤디앤뎁의 집에 놀러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죠.” 시그니처 메뉴인 데비스 베네딕트는 가장 자신 있게 추천하는 음식. 좋은 달걀의 노른자와 버터만 넣어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든 홀랜다이즈 소스를 곁들이는데, 한국에서는 소스가 너무 달거나 되직한 경우가 많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그 외에도 루콜라와 페타 치즈, 오렌지의 조합이 돋보이는 시트러스 샐러드, 특제 드레싱과 파슬리 오일로 맛을 낸 광어 세비체, 카펠리니 면 위에 바질 마리네이드한 토마토를 가득 올린 콜드 파스타 등 샴페인, 와인과 곁들이기 좋은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한국도자기와 협업한 데비스 로고 그릇은 화려한 패턴과 색감이 다이닝의 흥취를 한층 돋운다.
“판매 문의가 생각보다 많아서 주방 앞에 디스플레이 존을 따로 마련했어요. 앞으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이곳에서 소개하는 섹션으로 운영하려고 해요. 앤디앤뎁 닷컴에서 데비스 큐레이션이라는 프로젝트로 리빙 소품이나 올리브유, 발사믹 비니거 등을 판매했던 경험이 있거든요. 제가 추천하는 제품에 호응하고 관심 보이는 분이 많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기하더라고요. 데비스를 통해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터로 새롭게 성장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제 갓 오픈 3개월 차를 맞이한 새내기 윤원정 대표의 평온했던 일상은 매일 주방을 쉴 새 없이 오가는 하루로 변했지만, 그의 삶에는 되레 활력이 생겼다. 1999년 앤디앤뎁의 첫 압구정동 부티크에서 손님들에게 느꼈던 설렘과 희열, 보람이 다시금 되살아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