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을 선보이는
셰프 스테파노 디 살보의 보르고 한남은 서울에서 머나먼 이탈리아를 꿈꾸게 한다.
어릴 때 먹은 첫 서양 음식은 스파게티였고, 지금도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레스토랑 또한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서울에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존재하지만 제대로 된 곳을 만나기 쉽지 않고 계속 방문하게 되는 곳도 흔치 않다. 오너 셰프 스테파노 디 살보 Stefano di Salvo가 이끄는 ‘보르고 한남’은 까다롭고 트렌드에 민첩한 국내 미식가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호텔 F&B 업계의 유명 셰프던 스테파노는 국내에서는 파크하얏트 서울과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 그리고 파크하얏트 부산의 총주방장을 지냈다. 이전에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유수의 레스토랑과 고급 리조트의 총주방장을 역임했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 회사에서 일했던 아내 신혜영 이사를 만나 한국에 정착했고, 오너 레스토랑인 보르고 한남을 2019년 말 오픈했다.
‘동네, 마을’을 의미하는 보르고라는 이름처럼 인테리어는 따뜻하다. 이탈리아 풀리아 지역의 느낌을 반영해 은은한 미색이 감도는 자연스럽고 포근한 분위기로 꾸몄고, 스페셜 코스를 맛볼 수 있는 셰프의 테이블은 별도로 마련했다. 동네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편안하지만 진정한 이탈리아 음식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의 일과는 보르고 한남의 주방에서 시작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도착한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생선과 고기도 손질합니다. 라구나 비스크 소스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소스도 미리 만들어둡니다. 혼자서 식전 빵과 디저트까지 만들다 보니 몹시 분주하죠.” 셰프들의 오후 작업이 좀 더 수월하도록 자신의 기준에 맞게 직접 해오고 있는 일들이다. 오픈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문을 닫는 레스토랑도 많은 요즘 벌써 5년차를 맞이한 보르고 한남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이런 꾸준함에 있다. “항상 일정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오픈했을 때의 맛과 수준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해요. 국내 재료와 공급처를 알아가면서 제철 재료를 더욱 잘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봄에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여름에는 호박꽃, 그리고 아일랜드산 굴이나 질 좋은 참치가 있을 때는 스페셜 메뉴를 만들기도 하죠. 자주 와도 지루하지 않고, 처음 온 손님이나 단골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빨리 변화하는 것만이 발전의 기준처럼 여겨지는 요즘 시대에 그의 말에서 묵직한 뚝심이 느껴졌다. “셰프에겐 탄탄한 기본기가 정말 중요해요. 유행하는 맛과 멋을 흉내내는 것은 쉬울 수 있지만 좋은 셰프라면 소스를 만드는 법, 요리하는 데 필요한 기술 등 기본기를 갖춰야 해요. 그래야 어떤 재료를 만나도 잘 다룰 수 있죠.” 인터뷰 중에도 오븐 알람이 울릴 때마다 주방을 바쁘게 오가던 스테파노가 준비한 메뉴는 ‘멜란자네’와 ‘뽈뽀’, 그리고 ‘페스카토 델 조르노’다. “왜 이 세 가지 메뉴를 선택했냐고요? 아내의 말을 따른 거죠.(웃음)” 농담과 함께 메뉴 설명이 이어졌다. 보르고 한남의 단골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멜란자네는 가지를 튀겨서 토마토와 부라타 치즈를 올린 메뉴다. 스테파노는 가지를 튀기기 전에 미리 소금을 뿌려 물을 빼내면 좀 더 쉽게 요리할 수 있다는 팁을 전했다. “오늘 생선은 도다리예요. 즐겨 사용하는 생선이죠. 붉은빛이 아름다운 생선 성대도 좋아하고요, 카르파초를 만들 때는 도미를 사용합니다” 라며 물고기 모양의 큼직한 냄비의 뚜껑을 열자 타원형의 접시에 생선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는 항구 도시인 제노아에서 자랐고, 특히 토스카나의 호텔 일 펠리카노의 총주방장이었을 때 매일 아침 어부가 잡아온 생선으로 요리를 하면서 생선을 더욱 좋아하게 됐다. 페스카토 델 조르노, 즉 ‘오늘의 생선’ 요리는 그날 가장 맛이 좋은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조리해서 제주도산 딱새우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비스큐 소스를 곁들여 내는데, 여러 명이 모였을 때 더욱 분위기를 돋우는 메뉴다.
여전히 단골이 있고, 찾는 이들이 많은 보르고 한남의 비결은 무엇일까. “반짝하고 마는 유행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진짜 식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긴 나 자신이자 집 같은 곳이에요.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셰프의 집에 초대받은 것이죠. 이탈리아의 식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요.” 그의 말처럼 보르고 한남은 흔한 코카콜라 하나 없이 오직 이탈리아 제품으로만 채워져 있다. 사퀴테리를 자르는 베르켈 슬라이서는 이미 이곳의 시그니처이고 전통 증류주인 그라빠부터 직접 만든 담금주와 와인, 그리고 스테파노가 만드는 디저트. 요리 학교에서 전공을 결정할 때 파티세리를 고민했을 정도로 디저트를 좋아하고 관심도 많아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공부한 그는 빵과 케이크를 직접 굽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럼을 머금은 푹신한 빵인 바바 알 럼. 미슐랭 레스토랑일지라도 파티셰가 상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디저트를 그날 식사의 방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스테파노의 디저트는 재방문의 의사를 깊게 남긴다.
5년을 부지런히 달려왔으니 이제 그 다음을 기약할 때다. 스테파노에겐 어떤 계획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오픈한 지 5년이 됐네요. 처음 나의 레스토랑을 오픈한 이 동네를 좋아해요. 확장하거나 다른 지점 오픈하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렇지만 여긴 아까도 말했듯 나의 집 같은 곳이고 그래서 손님을 초대한 이상 제가 꼭 있어야 해요. 가게가 많아지면 그러기가 어렵죠. 그래서 지금처럼 방문한 분들이 이탈리아의 음식과 식문화를 맛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하고 싶어요. 여건이 된다면 카페나 디저트 숍을 오픈해보고 싶기도 하네요.” 담백한 대답을 끝으로 그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음식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의 파인 다이닝이 아닐까. 인터뷰 후 튀긴 가지의 말랑하면서도 바삭한 식감, 탱탱한 문어와 채소의 달짝지근함, 부드럽고 진한 맛의 생선 구이를 음미하며 속속들이 알지 못했던 이탈리아를 온전히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