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라이브러리, 게스트하우스, 학교 그리고 재생건축을 위한 동네 건축까지,각자의 타이틀은 다르지만 건축가의 혼이 담겨있다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었다.이제 일상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온 건축에 발을 들여 놓고 즐길 일만 남았다.
그대로 있어주면 돼
시간과 기억을 보존하면서 브랜드의 개성을 자연스럽게 투영한 젠틀몬스터의 계동 쇼룸을 방문했다.
어시스턴트 에디터 김수지 | 포토그래퍼 안종환
↑ 에너지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물인 ‘타임 트랜스포메이션’.
안국역에서 현대사옥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서면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 있다. 행정구역상 계동길로 불리는 길이다. 이 길에 자리한 중앙탕은 1969년 문을 연 목욕탕으로 이전에 중앙고 운동부의 샤워실로 사용되던 공간을 개조했던 계동의 랜드마크였다. 계동길에서 지인과 약속을 잡을 때면 중앙탕을 기준으로 설명할 만큼 그곳은 계동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하는 것 같더니 국내 안경 브랜드인 ‘젠틀몬스터’의 네 번째 쇼룸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휴식을 위해 찾곤 했던 계동길에 개성 강한 브랜드 쇼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지만 방문해보니 의외의 건물이 정겹게 자리하고 있었다.
젠틀몬스터의 쇼룸은 인테리어적인 면에서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젠틀몬스터의 네 번째 쇼룸은 가구 디자이너 그룹인 ‘패브리커’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패브리커는 다양한 무늬와 색을 가진 원단을 이용해 가구를 만드는 디자이너 그룹으로 이번이 세 번째 협업이다. “중앙탕을 처음 봤을 때 매력을 느꼈어요. 오래된 공간이기도 하고 계동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터넷에 이미지를 검색하면 언제나 중앙탕의 간판을 볼 수 있었죠.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공사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관리가 안 된 부분이 많았어요.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요. 본래 4월쯤 완공할 계획이었지만 제대로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결정하느라 오픈이 연기됐습니다.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외관을 살리는 방향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싶었어요.” 최대한 외형은 유지하면서 1층의 입구 부분만 황동으로 마무리해 젠틀몬스터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계동길에 은은하게 녹아든다. 1층 쇼룸의 뒤편에는 물을 데우는 화목 보일러를 그대로 남겨놨다. 벽에는 보일러실의 묵은 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보일러가 있는 공간과 이어지는 곳에는 사우나실을 만들어 열기와 불빛을 재현했다.
1 젠틀몬스터 계동 쇼룸을 멋지게 완성한 패브리커(왼쪽)와 젠틀몬스터의 공간 디자이너(오른쪽). 2 사우나의 열기와 불빛이 느껴지는 듯한 쇼룸의 복도.
↑ 중앙탕의 옛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3층 공간.
↑ 1층 입구엔 매표소로 쓰였던 창구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1 지난 시간의 정취가 느껴지는 화목 보일러. 2 타일을 들어내고 남은 적벽돌과 젠틀몬스터의 선글라스가 의외의 조화를 선사한다.
↑ 중앙탕의 외관은 그대로 남기고 입구만 황동으로 마감했다.
1층 천장에서 2층 바닥까지 관통한 ‘타임 트랜스포메이션 Time Transformation’도 젠틀몬스터 계동 쇼룸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에너지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설치물로 1층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가 운동에너지로, 운동에너지가 다시 전기에너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표현했는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1층의 거대한 모터가 2층으로 이어진 전구들의 빛을 밝힌다. 중앙탕은 본래 남탕과 여탕이 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남탕으로 사용된 2층은 공용탕의 일부를 부서진 상태 그대로 남겨놨고, 기존 욕탕의 타일을 들어내고 남은 적벽돌은 그대로 보존했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옛 중앙탕의 모습이 담긴 슬라이드를 볼 수 있어 더 한층 정겨움을 자아낸다.
“작지만 이 공간이 가진 매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 공간만의 역사와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새롭게 변신한 젠틀몬스터의 모습을 보면서 패브리커이기에 가능했던 결과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중앙탕의 시간과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브랜드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젠틀몬스터의 계동 쇼룸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을 적절히 변형하면서 현재와 과거가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으며 브랜드의 정체성 또한 투명하게 드러냈다. 계동길의 초입에서부터 멀찌감치 보이던 중앙탕 간판을 그대로 남겨둔 이곳은 진중함과 괴물 같은 매력이 공존하는 젠틀몬스터의 얼굴, 그 자체다.
너의 의미
지금 건축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네리&후를 상하이 사무실에서 만났다.
에디터 노은아 | 포토그래퍼 테리 배 Terry Bae
↑ 건축가 부부인 린던 네리 Lyndon Neri와 로산나 후 Rossana Hu가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파트너로서도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고 있는 두 사람.
1 세계 각국을 무대로 활동 중인 네리&후는 그들이 묵었던 호텔의 메시지 카드를 모아서 한데 붙여놨다. 2 장저우 르 메르디앙 호텔의 외관.
부부이자 동업자인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우리는 개인이 아닌 팀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하다 보면 시너지가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대부분의 것을 공유하되 시간과 가능 여부, 관심 정도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일하는 편이다. 우리 둘은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나는 주로 전체적인 틀을 만들고 아내인 로사나 후는 비평과 전체적인 운영을 맡는다. 우리의 성격도 매우 달라서 이런 체제는 한 가지 프로젝트에 얽힌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때 근시안에 갇히지 않으면서 더 완벽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준다.
2004년에 사무실을 오픈한 이래 두 사람의 활동은 11년째 접어들었다. 그리고 요즘 당신들은 건축계를 넘어 디자인계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임에도 당신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속적인 가치로 인정받으려면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문제에 건축적으로 답하는 것도 의미를 창조하는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공간을 활용한 문화적인 생산을 형성하고 탐구하는 일이다. 이런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는 작업실에서 많은 결정을 내린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지 떠올리고, 만약 경로를 이탈했다면 우리 스스로를 재정비하려고 노력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당신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변했다면 어떻게 변했나?
어떤 것은 유지되고 또 어떤 것은 변했지만 중요한 것들은 이전과 똑같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디자이너들이 트렌드와 패턴의 변화에 대응하듯이 우리는 대응뿐 아니라 먼저 예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트렌드를 예측하지만 그보다는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가정하고 앞서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들의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미학적 관심사, 우리의 성격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들은 올 한 해만 해도 영국 코벤트 가든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그리고 서울까지 다양한 지역에 걸쳐 네리&후의 흔적을 건축물로 선보일 예정이다. 각 지역마다 다양한 프로젝트의 착수에서 완성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각 프로젝트에 맞는 아이디어와 컨셉트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계를 허물려고 끊임없이 자문하다 보면 생각을 멈추지 못할 때도 있다. 컨셉트를 결정한 후 수많은 조사가 이어지는데 해외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다른 디자인 아이디어를 실험해보고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레이어링, 투시, 건물의 축조, 텍스처, 물성 등 항상 고민하는 요소도 있다. 사실 본질적으로 이런 이슈 중 몇 가지는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의 디자인 철학은 항상 기본 컨셉트에서 출발하는데 모든 프로젝트의 이면에 밑바탕이 되는 강력한 컨셉트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 디자인을 고민하고 논의하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 디자인 코뮨.
↑ 네리&후를 세계적인 건축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한 상하기 워터 하우스.
2015 메종&오브제에서 포르투갈의 가구 브랜드 드 라 에스파다 De la espada를 통해 셰이커 스타일의 의자를 선보였다. 드 라 에스파다와 당신들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창립자인 루이스 드 올리베이라 Luis de Oliveira가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고 프로젝트를 착수하기 전 1년여에 걸쳐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서로 의논했다. 우리는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협업은 비교적으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건축, 전시, 가구 디자인까지 당신들의 작업 영역 중 중심은 무엇인가?
건축은 여전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근간이며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르네상스적인 개념에서 가져온 디자인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며 우리의 멘토인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 Michael Graves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당신들의 작업을 보다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가이드를 준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말해달라.
의미, 진정성, 겸허.
올해 Imm 퀼른 전시회의 설치 전시 ‘das haus’는 어떤 의도로 진행되었나?
처음 생각은 매년 열리는 Imm 퀼른 전시회를 위한 집을 꾸미는 것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가정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 걸쳐 스스로 질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상하이를 기반으로 활동하지만 두 사람의 건축에서는 중국스러움을 초월한 다양한 감성이 느껴진다.
↑ 상하이 캠퍼 쇼룸이자 사무실의 모습.
몇 년 전, 상하이 푸동 pudong 지역에 갔을 때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건물 디자인과 건물 꼭대기를 장식하는 기상천외한 방식에 놀란 적이 있다. 도시의 첨탑처럼 인상적인 건물 옥상 디자인이 중국 건축의 관습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해외에서 자라고 살았던 당신들에게 이런 문화는 어떻게 다가왔나?
우리는 디자인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중국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스타일이나 건축양식과 같은 표피에만 주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뜰이 있는 집이라든가, 근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집 등 중국식 공간의 정수를 탐구하는 편인데 그것을 우리의 작업에 어떻게 적용할지 연구하곤 한다. 건축에 있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 등을 비롯한 수많은 경계를 허무는 것이 우리의 전반적인 주제다.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통해서 관습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경계를 밀어 붙여서 우리가 어디에 이르는지를 지켜보는 것 말이다.
2012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건축이 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 멘트 이후로 건축가뿐 아니라 디자인을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이 쇄도했다. 어떤 논쟁을 일으킬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건축가들이 프로젝트에서 직면하는, 이기적인 개발자들이 요구하는 무리한 마감일과 상업적인 압력에 대해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긍정적이어서 클라이언트들은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 실질적으로 우려하기 시작했고, 단순해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를 건너뛰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당신들 이전에 중국의 건축에 대해 알려준 사람은 왕슈 Wangshu였다. 그는 지역의 재료, 전통성을 이용한 건축으로 중국 건축의 지속성을 얘기했다. 당신들은 ‘중국적인 것’이라는 숙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나?
우리는 전통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전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심오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형태와 일시적인 가소성을 넘어서야 한다.
2012년에 새로운 디자인 플랫폼인 더 디자인 리퍼블릭 코뮨 The design Republic commune을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그것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매장이나 레스토랑, 호텔이 아니라 디자인에 관한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강의, 전시, 포럼 등의 형태를 통한 디자인 교류와 대화의 장으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우리는 바쁜 삶에서 잠시 벗어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 중요한 디자인과 관련 분야의 이슈를 토의하는 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건축이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건축은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상호작용하는지를 고스란히 투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은 한 시대의 문화적 흔적을 보존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요즘, 행복한가?
누구에게 질문하는가에 달린 것 같다. 나 린던에게 묻는다면 언제나 행복하다. 로산나 후는 언제나 우울하다.
사연 있는 미술관
찜질방으로 태어날 뻔했다가 미술관으로 회생했다는 특별한 사연을 품은 소다 미술관. 재생 건축의 또 다른 확장을 보여준다.
에디터 최고은 | 포토그래퍼 안종환
↑ 소다 미술관은 처음부터 건물이 비뚤게 지어져 입구가 안쪽에 숨어 있다.
↑ 2층 컨테이너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보라리 작가의 작품 ‘동굴 공간’.
경기도 화성시는 온천이 유명한 곳이라 일찍이 큰 규모의 찜질방이 성행했다. 그러나 300~400평 규모의 찜질방이 곳곳에 난립하던 중 사업 부진으로 폐업하는 곳도 속출했다. 화성시 안녕시에 자리한 ‘소다 Soda(Space of Design and Architecture)’ 미술관도 본래 찜질방으로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건축주의 사정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콘크리트 구조만 남은 채 5년간 방치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흉물이 된 이곳을 미술관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건 싱크 CINK 건축설계사무소의 권순엽 대표였다. “실측을 해봤는데 철거 비용이 2억 정도 나왔어요. 비용도 그렇지만 이 골격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층고가 높고 방도 많으니 미술관으로 제격이겠다 싶었죠.” 하버드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그는 한국적인 문화인 찜질방 구조가 매우 흥미로웠다. 방을 하나의 캔버스로 보고 점차 확장해 나가는 공간으로 해석했고 그 내부를 사람이나 작품이 채워 나가는 열린 미술관을 상상했다. 재생의 취지에 맞게 벽을 하나도 부수지 않고 본래 지어진 모습을 최대한 활용해 실내와 야외 전시장을 만들었다.
그중 ‘루프리스 갤러리’라고 불리는 야외 전시장은 소다 미술관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곳이다. 설치 작품이 있긴 하지만 곳곳을 빈 채로 남겨두었는데 관람객이 잔디 마당, 하늘 사이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건물의 맨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 야외 전시장을 내려다보면 건물의 또 다른 면모가 보인다. “동네 업자가 이 건물을 대충 앉히는 바람에 건물 전체가 길과 비틀어져 있었어요. 이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으니 2층만이라도 잘해보자 싶어서 정방향으로 길을 만들었죠. 그랬더니 새로운 그리드가 생기더라고요.” 길의 방향이 약간 달라졌을 뿐인데 이 덕분에 건물의 다른 구조와 면이 보이고 공간이 움직인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권 대표는 미술관으로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2층에 3개의 컨테이너 전시장을 만들고 데크를 깔았다. 옛 건물에 새로 길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삼각형의 빈 공간. 그는 이것이 소다 미술관의 아이덴티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를 모티프로 삼아 소다 미술관의 로고와 삼각형 테이블을 디자인했다.
↑ 건물 방향은 비뚤어져 있지만 2층의 길은 정방향으로 배치해 건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1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는 놀이터가 되기도 하는 야외 전시장. 2 야외 전시장에는 곳곳에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 소다 미술관의 첫 개관 전시인 <리:본 Re:Born>에서는 건축가들이 설계만 하고 지어지지 못했던 프로젝트를 모아 소개했다.
1 야외 전시장에는 곳곳에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2 관람객은 독특한 구조의 야외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건축이 주는 자극을 느낄 수 있다.
권 대표의 아내이자 소다 미술관의 운영을 맡게 된 장동선 관장은 이곳이 건축과 대중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접근하기 쉬운 미술관이기를 희망했다. “건축을 어려워하지만 사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이 공간이고 건축물이잖아요.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학교에 등교하고 주말에는 쇼핑하러 가지만 평소에는 잘 인지하지 못하죠. 색다른 구조의 건물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건축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이 신경 썼어요.” 대지 6600㎡에 건축면적 약 1652㎡이르는 소다 미술관은 큰 규모의 미술관에 비하면 작은 편이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차게 마련해 미술관의 벽을 낮추고 보다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야외 전시장에는 스프링클러를 통해 온천수로 만든 비가 내려 아이들이 각자 만든 우산을 쓰고 비 맞는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고 텃밭 학교, 미술 수업 등도 마련했다. 기획 전시의 관람료는 3천원인데 전시가 끝날 때까지 재입장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이곳을 자주 방문하고 오래 머물다 갔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개관하고 겨우 세 달째 아무도 찾지 않아 흉물 같았던 이곳은 이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친근한 동네 미술관이 되었다. “이 건물이 갖고 있는 이야기는 마치 유전자 같은 거죠. 그것이 재생 건축이 가진 매력인 것 같아요. 특별한 사연을 알고 나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갖고 건축물을 바라봐주죠.” 권 대표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발견해 생명력을 이어나가게끔 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소다 미술관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건축에 눈뜨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