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작가 류은영은 빈티지 가방에 파리와 뉴욕 등지의 벼룩시장과 경매 등을 통해 찾아낸 장식을 더해 새로운 스타일의 가방을 만든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과거를 빌려 보다 찬란한 오늘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빈티지를 사랑하는 류은영 작가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세상과 소통하는 법.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역사적인 건물인 남산 맨션에 위치한 류은영 작가의 공간. 미스 반 로에의 바르셀로나 데이베드를 비롯한 빈티지 가구와 소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배치해 개성이 넘친다. 벽에는 피카소의 1962년 작인 ‘pour mon ami pierre’가 걸려 있다.
국내를 비롯해 파리와 뮌헨, 홍콩 등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류은영 작가.
1950년대의 샤넬 버튼, 1900년대의 실버 이니셜 레터, 벨기에산 빈티지 레이스 등으로 장식한 류은영 작가의 가방에는 언제나 가방을 장식한 재료들의 출처와 생산 연도, 구입 스토리 등이 담겨 있는 ‘히스토리 레터’가 동봉된다. 파리와 뉴욕의 벼룩시장과 앤티크 경매장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찾아낸 빈티지 재료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류은영 작가는 그녀의 가방을 통해 사람들에게 각 재료에 담긴 세월의 흔적과도 같은 역사적 이야기를 하나하나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그녀의 가방 브랜드의 이름도 ‘히스토리 바이 딜란’. 여기에서 딜란은 작가의 영어 이름이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빈티지 제품은 알면 알수록 감흥의 진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오래됐지만 마주할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빈티지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일찍이 오래된 것에서 감흥을 느껴왔던 류은영 작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젊었을 때부터 모아온 잡지를 보며 과거의 패션 스타일에 흠뻑 취하곤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통 넓은 바지와 얼굴의 반은 가릴 정도로 커다란 선글라스 등을 매치해보며 어른이 되었을 때의 패션 스타일을 상상하곤 했는데 이때의 기억과 감성이 가방 디자이너가 된 지금까지 그녀 작품의 근간이 되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오랫동안 들고 다니셨던 1970년대의 크리스찬 디올 가방을 저에게 물려주셨어요. 패션을 전공했던 터라 제가 직접 레이스를 염색해 붙이고 1950~70년대의 테이프로 장식하는 등 리폼을 했어요.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히스토리 바이 딜란의 시초라고 할 수 있어요.”
1 거실에 에르메스의 주황?색 박스를 트리처럼 쌓아 색다른 오브제를 만들었다. 빈티지 에르메스 가방은 류은영 작가의 주된 소재이기도 하다. 2 1999년 뉴욕에서 구입한 귀여운 보라색 곰돌이와 조카가 선물한 캐멀 컬러 곰돌이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침실.
1 한 땀 한 땀 정성 어린 수작업을 통해 완성되는 가방들. 2 갈색 크리스찬 디올 백이 처녀작이다. 3 파리에서 공수한 1900년대 실버 이니셜 레터.
파리와 벨기에를 넘나들며 한 달 이상의 긴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류은영 작가가 거실 소파 앉아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은 친구이기도 한 지니리 작가가 생일 선물로 그려준 작가의 초상화. 아래에는 프랑스의 유명 작가 장 자크 상페가 그녀를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
류은영 작가의 빈티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최근에 새롭게 마련한 주거 공간이자 아틀리에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지난 1972년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남산 맨션에 자리한 그녀의 공간은 들어서자마자 잠자고 있는 감각을 일깨우듯 온갖 빈티지 제품의 화려한 향연이 시작된다. 거실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가 있고 주방 테이블에는 1970년대의 임스 체어가 그린과 레드, 퍼플 등 색깔별로 놓여 있다. 식기장에는 앤티크 경매를 통해 구입한 빈티지 식기가 오롯이 놓여 있으며 침실에도 역시 경매로 구입한 뉴욕 플라자 호텔의 베딩 세트가 침대를 감싸고 있다. “패션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2005년부터 2년 동안 뉴욕에서 살며 수많은 빈티지 제품을 구입했어요. 빈티지라고 하면 낡고 오래돼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나죠.” 거실 한 켠에는 길쭉한 고재 테이블 위에 재단용 가위와 바늘, 색색의 실패, 재봉틀 등 갖가지 작업 도구가 놓인 그녀의 작업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작업용 테이블 옆에는 브루클린에서 구입한 커다란 빈티지 서랍장이 있다. 1950년대 판화 작가들이 사용하던 이 서랍장은 칸칸이 나뉘어 있는 여러 개의 서랍이 달려 있어 가방에 붙일 빈티지 장식을 종류별로 수납하기에 적격이다. 또 작업용 테이블 옆에 있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1930년대 프렌치 암체어는 벼룩시장에서 구입해 작가가 1950년대 크리스찬 디올의 패브릭으로 커버링을 했다. 그런데 류은영 작가의 공간은 그녀만의 특별함이 있다. 모든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빈티지 제품으로 채웠음에도 전혀 예스럽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티지가 과거에서 온 것은 맞지만 구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재조합하고 스타일링을 하느냐에 따라 획일적인 현대의 것보다 훨씬 개성이 넘쳐나는 물건이 되죠.” 류은영 작가는 오늘도 작업대의 빈티지 의자에 앉아 과거에서 온 물건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는다. 이제 많은 물건이 그녀의 감성에 의해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 새로운 작업물로 탄생할 것이다.
1950년대 빈티지 핸드메이드 테이블보와 파리에서 구입한 1930년대 빈티지 태슬로 조카들을 위해 캠핑 텐트를 만들었다. 텐트 뒤의 클래식한 의자는 경매로 구입한 것. 뉴욕 플라자 호텔 스위트룸에서 사용하던 의자다.
리옹에서 구입한 1950년대 로즈 골드 컬러의 거울과 1950년대 여자 누드 태피스트리 작품 등 욕실 또한 갖가지 빈티지 소품으로 채웠다.
1 1970년대 크리스찬 디올 빈티지 패브릭으로 커버링한 암체어. 2 1990년대 샤넬 가방에 1950년대 샤넬 오트 쿠튀르 잼 스톤 버튼과 뉴욕에서 구입한 1980년대 스탬핑으로 장식해 전혀 다른 느낌의 핸드백을 만들었다.
1 빈티지 식기 컬렉션. 중앙에 이니셜 P가 새겨진 접시는 경매로 구입한 뉴욕 플라자 호텔의 접시다. 2 어쩌면 류은영 작가가 집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인 주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