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은 무난함의 대명사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공간이 풍성해질 수 있다. 세 살배기 딸 예린이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황유미 씨의 집이 바로 그런 사례다. 남편이 어릴 적부터 살았던 잠원동의 한 아파트에 신혼집을 마련한 부부는 얼마 전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이사했고 이번에는 고쳐 살리라 다짐했다. 지은 지 35년이 넘은 아파트라 곧 재개발에 들어가지만 난방 시설 등 기초공사가 시급했던 것이다. 그녀는 잠깐 지내더라도 제대로 갖추자는 생각으로 평소 눈여겨보던 디자인투톤의 최현경 실장에게 연락했다. 인테리어 회사의 소속 디자이너로 일하다 올해 초 독립한 최 실장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젊은 감각으로 집을 꾸며보고 싶어 의뢰를 결심했다. “사실 동네에 있는 인테리어 시공 업체도 알아봤어요. 그런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견적도 더 비쌌죠. 최 실장과는 밝은 것보다 어두운 색을 좋아하는 부분이나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일치했어요. 장식적이기보다 과감하면서 세련되게 공간을 연출하는 점도 좋았죠.” 그녀는 이 낡은 아파트를 잘 정리해달라는 정도만 부탁했고 나머지는 최 실장의 감각에 맡겼다. “독립 후 주로 상업 공간을 디자인하고 시공하다가 처음 맡게 된 주거 공간이어서 저에게도 의미가 있었어요. 또 믿고 맡겨준 만큼 애착을 갖고 작업할 수 있었죠.” 최 실장이 설명했다.
주방 | 중간에 검정 타일을 붙여 힘을 잡아줬고 시원한 느낌을 내기 위해 상부장은 과감히 포기했다.
주방 | 상부장 대신 선반을 달아 부족한 수납을 보완했다. 주방 가전과 소품들도 흰색과 검정으로 골라 통일감을 주었다.
거실 | 거실은 가족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놀이방 겸 공부방으로도 쓰고 있다. 공간 활용을 위해 부피를 차지하는 가구 대신 선반을 활용했다.
왼쪽)현관 |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사진은 오지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신문 기자의 사진전에 갔다가 구입한 것. 어린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마음에 들었다. 오른쪽)현관 | 4가지 무늬가 한 개의 타일에 새겨진 커다란 타일로 현관 바닥을 장식했다.
서재 | 이곳 역시 회색을 기본으로 사용했다. 책장 대신 선반장을 달고 천장에는 황동색 루이스 폴센 조명으로 포인트를 줬다.
먼저 군데군데 있던 라디에이터를 뜯어내고 울퉁불퉁한 벽과 바닥, 내려앉은 천장을 깨끗이 정돈하고 기초를 다졌다. 82㎡의 아담한 크기였기에 베란다를 전부 확장해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곳과 구조가 동일했는데, 식탁을 놓을 수 없을 만큼 공간이 비좁은 게 내내 아쉬워 주방을 넓히기 위해 기존 세 개의 방 중 하나를 없앴다. “흰색 식탁은 집주인이 의뢰하기 전부터 골라놨던 물건이었어요. 그 식탁이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벽과 안방 문을 짙은 회색으로 도장해 하나의 벽면처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죠.” 흰색 식탁에 맞춰 선반과 소품도 흰색으로 결정했다. 보통 흰색은 눈에 튀지 않기 위해 선택하지만 바탕을 회색으로 하다 보니 흰색 가구와 소품이 더욱 환하게 돋보였다. 부엌은 시원한 인상을 주기 위해 상부장 대신 작은 선반을 달아 천장을 비웠고 허전하지 않도록 검은색 타일을 붙여 중심을 잡았다. 주방뿐 아니라 서재, 거실 등에도 수납장을 만들지 않고 선반을 활용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만큼 물건이 많다 보니 수납장을 많이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길게 잡아야 이 집에서 5년 정도밖에 못 살기에 되도록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들로 꾸며야 했죠.” 공사 비용도 빠듯하게 책정했기 때문에 주방과 서재, 현관 등 일부에만 힘을 줄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간결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취향이기도 했다. 짙은 회색과 검정이 주는 차가움을 중화시킨 건 분홍색 식탁 의자다. 채도가 높지 않은 은은한 색상이라 회색과도 잘 어울리고 모노톤이 주는 삭막한 느낌도 없앴다. 단조로운 이미지의 회색을 배경으로 다채롭게 꾸민 이 집은 눈에 쏙 들어오는 화사한 색감만이 포인트가 되는 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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