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공간과 주거 공간이 더해진 40평 남짓의 빌라. 과감한 벽 마감과 다채로운 공간 분할로 한층 풍요로워진 이 집은 도서관, 카페, 캠핑장이 부럽지 않은 재주 많은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1,3 햇살이 잘 드는 거실. 길게 드리워진 베란다 그림자 덕에 공간이 더욱 풍성해 보인다. 2 식물, 특히 선인장 가꾸기에 푹 빠진 집주인 문성진 씨.
한때 카페 같은 집이 유행이었다. 그러면서 커피숍에서 볼 법한 메뉴판을 주방 벽에 억지스럽게 달아놓고 위안을 삼았다. 갤러리 같은 집은 또 어떤가. 작품에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레일 조명을 형광등 대신 달아놓진 않았나. 상업 공간에서 보았던 멋진 것을 그대로 집 안에 옮겨놓다 보면 어설프고 불필요한 장식이 수반된다. 그렇다. 집과 가게는 엄연히 다르다. 용도가 정해진 상업 공간과 달리 집은 잠도 자고, 요리도 하고, 책도 보고, 가끔은 운동도 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다변적이다. 카페 같은 집이 카페 같을 수 없는 이유다.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무난하고 평범한 인테리어가 해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흰색 벽지로 무장한 그 심심한 공간에서 느끼지 못했던 어떤 특별한 감흥, 나를 감동케 하는 무엇을 집 안에 구현하고 싶다는 욕구에 우리는 응해야 하니까.
20여 년 전, 당시로서는 드물게 마당 있는 집을 레스토랑으로 고친 ‘올리바’를 오픈하고 그 후 여러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문성진 씨는 오랫동안 상 공간 인테리어를 구상해온 만큼 집 안에도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비교적 열려 있었다. 특히 나이든 건물이 갖고 있는 매력을 찾아내는 안목의 소유자로 오래된 집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아파트에 살았던 그녀는 방배동에 38년 연식을 지닌 3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을 찾아내고 이곳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거주와 전시장을 겸하는 하우스 갤러리처럼 집과 다른 프로그램이 결합된 구조로 계획했어요. 최근 우리나라에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형태죠. 요즘 집을 공방처럼 사용하며 클래스를 운영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잖아요. 이 집도 다양한 클래스나 하우스 파티를 하기 적합한 곳으로 고려했죠.” 이 집의 인테리어를 맡은 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의 임태희 소장이 설명했다.
1,2 거실과 이어지는 작은 응접실은 독일 빈티지 가구로 채워놓았다. 칠판 페인트를 칠한 슬라이딩 도어는 딸아이의 캔버스. 어느날 자고 일어나 보니 꽃을 그려놓았는데 아직 미완성이란다. 3 어둠침침했던 창고의 문을 뜯어내고 책장을 달아 작은 서가로 만들었다.
문성진 씨의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설계하며 2008년부터 호흡을 맞춰온 임 소장은 2년 전 건강 문제로 사업을 정리한 후 수제 비누와 향초, 쿠킹 클래스 등을 진행하는 라이프스타일 디렉터로 전향한 그녀를 위해 특별한 집을 계획했다. 먼저 40평 남짓한 공간을 여럿으로 나눴다. 거실은 긴 원목 테이블이 있는 메인 거실과 슬라이딩 도어로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응접실로 나누고, 거실과 주방은 거울로 된 파티션을 사이에 놓아 필요에 따라 열고 닫으며 공간을 분리해서 쓸 수 있도록 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평수가 작아서 넓힐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최대한 확보했어요. 주방은 기존 야외 복도였던 부분을 터서 집 안으로 들였고, 식물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취향을 고려해 거실에는 작은 베란다를 새로 만들었죠.” 최가철물점의 최홍규 관장이 만들어준 철제 베란다는 최근 식물 가꾸기에 빠진 문성진 씨의 취미 공간이 되었다. 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 정도로 좁은 크기이지만 이 작은 베란다 하나가 더해지면서 집 안이 한층 다채로워진 것. 또 거실에 있던 기존 창고는 문을 터서 작은 서가로 만들고 메인 거실을 사무실이나 서재로 겸할 수 있도록 했다. 임태희 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벽과 벽이 이루어내는 레이어다. 공간에 들어서면 벽 너머에 다른 공간이 보이고, 그 너머에 문과 창이 있어 공간에 한층 깊이감을 준다. 동선 또한 복잡하기 때문에 훨씬 풍부한 느낌이 든다. “레스토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동선이죠. 일하는 사람과 홀에 있는 사람이 부딪히면 안 되잖아요. 이 집도 그런 동선에 신경 썼어요. 거실을 통하지 않고도 주방에서 세탁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까지 일자로 연결될 수 있도록 뒤쪽에 통로를 내었는데 집안일을 할 때 아주 효율적이죠.” 집주인인 문성진 씨가 덧붙였다.
1,2 38년 동안 나무 루버에 갖혀 있던 벽돌을 살려 거칠게 마감한 것이 특징인 주방. 3 기존 야외 통로였던 곳을 확장하며 약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철골로 지지대를 만들었고, 그 옆에는 맞춤 제작한 그릇장을 놓았다. 4 주방과 이어지는 방들. 각 방마다 방 주인의 생일을 적어놓은 점이 위트있다.
이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바로 텍스처. 짙은 나무로 둘러싸인 기존 루바 벽을 떼어내고 나니 층층이 쌓인 벽돌이 맨살을 드러냈다. 이 부분을 벽지나 페인트로 깔끔하게 바르지 않고 벽돌의 거친 질감을 살려 벽을 마감한 것이다. 낮았던 천장은 시원하게 터서 3.5m 정도의 높이로 살리고 기존 천장이었던 부분을 암시하는 듯한 연출을 통해 재미를 더했다. 거실 한쪽 벽면은 회색 벽돌에 아무런 마감을 하지 않고 기존 천장까지만 흰색 페인트로 칠하고 또 그 선에 맞춰서 거울 파티션과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한 것. 4.5m의 거대한 아일랜드 식탁이 압도하는 주방 역시 위쪽 벽돌은 흰색 페인트로, 아래쪽은 벽돌 사이를 흰색 시멘트로 거칠게 메워 질감이 펼쳐내는 시각적인 재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가닉한 요리를 만들 때 정말 아무런 조미료도 넣지 않으면 맛이 없어요. 설탕이나 소금을 쓰되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맛있고 풍부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죠. 그것처럼 이 집도 이 건물이 본래 갖고 있던 재료를 잘 쓰는 것이 숙제였어요.” 전문 셰프를 초청해 오가닉을 주제로 쿠킹 클래스를 열 계획이라는 문성진 씨는 이 집이 ‘오가닉 하우스’가 되기를 희망했고 다양한 질감으로 벽 마감을 하며 이러한 고민을 해결했다.
안방과 드레스룸, 고등학생 딸아이의 방은 클래스나 파티가 열릴 주방과 이어진다. 각각의 방문에는 호텔처럼 번호가 적혀 있는데 알고 보니 방 주인의 생일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가족들의 생일을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데다 함부로 열면 안 될 호텔 방 같은 느낌이라 외부 사람이 왔을 때도 개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재치 있는 발상이 돋보였다. 원래 물탱크가 있던 자리에 작은 방을 만들고 한 켠에 조리대를 놓은 옥상은 야외 파티나 집에서의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문성진 씨의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 볕이 잘 들어 책을 읽기도 좋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상공간과 주거 공간의 요소가 교묘히 겹쳐지며 여러 즐길 거리로 채워진 이 다재다능한 집은 누구라도 부러워 마지않을 그런 곳이었다.
1 침대 위에 걸어놓은 사진은 비투프로젝트 대표의 작품. 흰색 리네로제 침대와 흑백사진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2 문성진 씨가 만든 수제 비누와 화장품. 3 현관으로 향하는 통로 역시 옛날 계단과 벽돌을 살리고 노출 콘크리트를 더해 거친 멋을 냈다. 4 다락방을 갖고 싶다는 딸아이의 바람을 고스란히 반영한 방.
1,3 물탱크가 있던 옥상에 작은 루프톱을 만들어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2 바비큐 파티로 캠핑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옥상. 잔뜩 심어놓은 꽃나무가 만개할 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