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서 주방으로 곧장 향하는 문에서 바라본 풍경. 검은색 아일랜드 식탁 위에 줄줄이 걸어놓은 테라코타 조명과 나무, 동물 모양의 소품이 집 안에 작은 야생 공원을 만들어냈다.
입구에 아무렇게나 놓인 커다란 나무들 덕분에 이곳이 디자인 알레 우현미 소장이 사는 집임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어지는 풍경은 짙은 회색 타일, 자갈을 섞은 시멘트로 마감한 널찍한 현관. 문을 여니 분당의 한 아파트가 아니라 고요한 단독주택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듯 묘한 기분으로 압도되었다. 70평 규모의 넓은 아파트에서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식구들이 줄어 지난해 5월, 이곳 48평 아파트로 오게 되었다는 우현미 소장은 영국 유학 중인 아들, 16살 된 반려견 딸기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아들이 방학 때만 집에 오니 거의 홀로 지내다시피 하는데 이렇게 혼자만의 집을 갖게 된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공사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할 수 있었죠. 다른 가족이 있었으면 의견을 물어봤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도면도 없이 현장에서 바로 스케치하고 시공해주시는 분과 대화로 해나간 거예요.” 뜯어보니 이런 구조가 있었고 이걸 어떻게 하겠다는 결정을 즉흥으로 했다고 하기엔 완성도가 높은 집이었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현관에서 곧장 주방으로 향할 수 있는 문을 내거나 아들의 침실과 연결된 서재에서도 곧장 욕실로 향할 수 있도록 문을 만드는 등 동선을 고려한 요소만 봐도 단지 근사해 보이도록 고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 “큰 프로젝트는 숍 드로잉과 도면을 완벽하게 해서 줘야 하지만 이건 내가 쓰는 거고 문제가 있으면 내 책임이니까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쉽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그간 쌓아온 내공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1 아들의 서재에 놓은 나무 테이블은 언젠가 프로젝트를 할 때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했던 것이다. 2 현관에 둔 의자에 앉아 있는 우현미 소장과 반려견 딸기. 3 영국에서 유학 중인 아들의 침실은 벽면의 미닫이문을 열면 서재와 곧장 이어지도록 개조했다. 4 널찍한 현관 끝에 놓은 푸릇한 식물들과 자갈을 섞은 시멘트 벽이 마치 주택의 외관 같은 느낌을 준다.
벽은 흰색을 기본으로 회색으로 포인트를 줬지만 그 디테일은 여느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색과 약간의 크림색, 회색 페인트가 섞여 있는데 새하얀 벽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알고 보니 흰색만 사용하면 눈이 부시고 때가 타도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톤을 살짝 낮추고 약간 얼룩이 지도록 붓을 섬세하게 두드려가며 도장했던 것. 멋스럽기도 했지만 편히 생활하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현관을 지배하는 자갈을 섞은 시멘트 벽은 거실의 포인트 벽으로도 활용했다. “자갈의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어요. 옛날 담벼락이나 건물 외벽에 자주 사용하던 방식인데, 요즘은 미장공이 많이 없어져 어렵게 부탁을 한 거예요.” 본래 소파 자리는 지금 TV가 있는 곳이었지만 입구에서 들어오면 시선이 곧장 향하는 쪽에 포인트 벽을 만들고 푹신한 제르바소니 소파를 놓아 포근한 인상을 더했다. 천장도 러프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전부 뜯어내고 15cm 정도 높였는데 이 약간의 차이 덕에 공간이 한결 시원해 보였다. 나무판이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대들보는 주택의 지붕을 만들 때 기본이 되는 구조로 아파트의 전형적인 느낌을 깨고 싶어서 적용했다. “목수들이 일할 때 현장에 맞춰 작업대를 만드는데 그때 막 사용하는 나무가 있어요. 처음에는 하얀 나무였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시멘트나 페인트, 각종 먼지가 묻어서 이런 오묘한 색이 되죠. 시간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좋아해서 천장에 이 나무를 사용했어요.”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대들보가 인상적인 거실. 오크 원목 마루에 놓은 푹신한 제르바소니 소파는 아늑함 그 자체다.
15cm의 마법은 또 있다. 주방의 벽 쪽에 있는 기둥을 따라 ㄱ자로 얇은 철제 장을 짜 맞췄는데 와인잔과 잼, 각종 소스가 이 크기면 전부 수납할 수 있어서 유용하단다. “20~30cm 정도 넉넉한 깊이의 장은 안쪽에만 물건이 들어 있거나 꽉 들어차 꺼낼 때 너무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눈에 보이도록 줄줄이 놓으니 실용적이죠.” 우현미 소장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에 맞는 가구를 제작하는 편인데 철재를 즐겨 사용한다. 나무보다 유연해서 생각한 대로, 스케치한 대로 구현할 수 있고 다른 소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잘 지탱할 수 있어서다. 아들의 서재에 둔 철제 책장도 그녀의 솜씨. 이전 집에서 사용하던 낮은 TV장 위에 얹히도록 제작했는데 선반 기둥이 앞뒤로 랜덤하게 오도록 실험적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가구를 디자인할 때 가장 중시하는 점은 비례다. 주변 공간의 비례를 고려해 주방 아일랜드 식탁을 철재로 만들고 그 위에 단단한 화강암 중 하나인 마천석을 올려서 완성했다. 안방에 있는 가구도 그랬다. 티크 집성 합판 소재의 수납장은 창문의 비례를 고려해 정사각형으로 디자인했고, 그 높이에 맞춰서 침대 헤드보드를 제작한 것. 특히 ㄷ자 모양의 헤드보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누웠을 때 시선을 막을 정도만 벽을 낸 건데 이 작은 차이로 아늑함이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주방은 검은색 타일과 철제 선반으로 깔끔하게 마감하고 메인 조명 대신 검정 브래킷을 달았다.
1 콘크리트 화분을 뒤집어 침대 옆에 두고 선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2 빛이 잘 드는 안방. 나무 그림자가 드러워져 공간이 더욱 풍성해 보인다. 3 안방에 딸린 욕실은 전면을 대리석으로 마감해 더욱 반짝인다.
오롯한 휴식의 장소는 또 있다. 안방에 딸린 욕실은 기존 드레스룸이었던 공간까지 터서 널찍하게 만들었는데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흰색 대리석으로 무장해 눈부시게 반짝였다. 우현미 소장은 여기서 반신욕을 하며 피로를 풀곤 한다. 아무래도 혼자 편하게 지내는 집이다 보니 가구를 많이 두지 않았고 뉴욕 일러스트레이터 브라이스 와이머 bryce wymer의 단순하면서 에너지 넘치는작품, 소설가이자 목수 김진송 씨가 만들어준 독특한 모양의 의자 등 좋아하는 몇몇 소품으로 포인트를 줬다. 무엇보다 물건의 쓰임을 달리한 점이 흥미로웠다. 당나귀가 짐을 짊어질 때 사용하는 쌍바구니는 침대 옆에 두고 책, 잠옷, 슬리퍼 등을 마구 넣어놓는 데 쓰고 있고, 고무나무 수액을 채취하기 위한 에티오피아산 테라코타 컵은 구멍을 뚫어 전구를 넣은 후 금속 행어에 나팔꽃처럼 얼기설기 널어놓고 식탁 조명으로 활용했다. 이전 집에서 식탁으로 사용하던 나무 테이블은 언젠가 손님을 초대하면 다시 식탁으로 꺼내 쓸 계획으로 남겨두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화분을 올려두는 받침으로 기한 없이 대기하는 중이다. “프로젝트를 하다 상태가 나빠진 식물은 버리곤 하는데 그게 안타까워서 하나둘 차에 실어오게 되었어요. 여기 있는 식물은 다 그런 사연이 있어요. 예쁘지 않은 강아지가 없는 것처럼 식물도 그런대로 자라면서 나름의 조형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해요. 무성하거나 연약한 모습마저도 식물이 지닌 아름다움이에요.”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부터 작은 정원으로 계획되었던 발코니에는 담쟁이 덩굴이 타고 올라갈 지지대를 추가로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생긴 클로버도 뽑지 않고 그냥 놔뒀다. 식물이 이토록 편안하게 있으니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평온해질 수밖에 없었다.
1 주방 한쪽 벽에 작지만 아주 실용적인 15cm 깊이의 철제장을 ㄱ자 모양으로 맞춰 넣었다. 2,3 아파트 시공 당시부터 실내 정원으로 계획된 발코니에 담쟁이 덩굴이 타고 올라 갈 수 있는 지지대를 만들었다. 4 현관과 거실, 주방, 아들 방이 교차하는 복도. 맨 끝에 아들이 사용하는 욕실이 보인다.
마이 알레에서 사용하던 콘크리트 화분을 뒤집어 선반으로 활용했다. 그 위에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브라이스 와이머의 작품을 올려놨다. 한쪽 벽에 짜 넣은 수납장은 철거 후 생긴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