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큐브의 틀에서 벗어나 ‘집’ 형태를 갖춘 컨템포러리 아트 디자인 뮤지엄 ‘구 하우스’가 양평 문호리에 오픈했다. 디자인 포커스 구정순 대표가 만든 커다란 집, 그곳에서 받은 감동은 거대했다.
1 집을 컨셉트로 한 뮤지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리빙룸. 르 코르뷔지에를 오마주한 자비에 베이앙의 설치 작품 ‘Mobile’ 아래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빈티지 가구로 공간을 꾸몄다. 2 제프 쿤스의 작품 아래 구정순 대표의 반려견 ‘융’이 작품을 감상하듯 귀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3,4 조민석이 건축한 ‘구 하우스’의 외관. 회색 벽돌로 마감한 외관은 빛과 각도에 따라 무수한 픽실레이션을 선보이는 커다란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갤러리스트이자 가구 수집가인 니나 야사르 Nina Yasaher는 수년에 걸쳐 전 세계를 다니며 발견한 제품과 미술 작품 그리고 가구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닐루파 데포를 오픈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디자인 포커스 구정순 대표는 아티스트적인 오라와 끊임없는 도전정신, 아름다움을 보는 남다른 혜안을 가진 인물로 한국의 여성 디자인 파워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녀와 닮았다. 1983년 설립된 디자인 포커스는 CI 전문 회사로 국내에서는 그 개념조차도 모호하던 시절 이 시장을 개척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KB국민은행, KBS, 한국일보, SK 브로드밴드 옥수수 등 국내 굴지의 기업 CI는 모두 그녀의 손길을 거쳐 탄생됐다. 인생의 절반을 그래픽디자이너로 살아왔던 그녀가 뮤지엄을 오픈한다고 하니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하지만 이 뮤지엄은 지난 30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인생 2막을 위해 준비해온 결과물이다. “오래전부터 나이가 들면 미술관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컬렉션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청소년을 위한 미술관도 생각했어요. 그러다 창의성이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뮤지엄이 좋겠다 싶어 방향키를 돌렸죠.”
5 설치 미술가 최정화의 ‘The present of century’ 시리즈 작품 뒤로 세로로 길게 뻗어 있는 구 하우스의 구조가 보인다.
구 하우스는 예술과 디자인이 주는 즐거움을 일상에서 느낄 수 있도록 ‘집’을 컨셉트로 디자인한 뮤지엄이다. 집을 닮은 구 하우스는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남다른 의도가 포착된다. 화이트 큐브 대신 낯익은 누군가의 집에 들러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감상하듯 편하게 각각의 룸을 오가다 보면 나의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이는 기획 단계부터 소장품 각각의 배치를 염두에 두어 모든 전시실에 효율적인 동선을 부여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끌어들인 결과인 셈이다. 전시실의 이름도 리빙룸, 라이브러리, 다이닝룸, 패밀리룸 등으로 집과 같다. 총 10개의 전시실에는 구정순 대표의 개인 컬렉션들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는데 장 프루베, 피에르 폴랑, 샬롯 페리앙, 에토레 소트사스, 조지 나카시마 등의 가구부터 조한나 바스콘셀로스, 자비에 베이앙의 설치 작품, 로버트 인디애나, 제프 쿤스, 스타스키 브리네스의 페인팅, 데미안 허스트, 토비아스 레베르거, 프란츠 웨스트의 조각 작품, 국내 작가 서도호, 최정화, 김인배의 작품 등 회화에서부터 설치 미술, 조각, 영상과 사진, 빈티지 가구까지 20세기 현대미술 작품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르 코르뷔지에를 오마주한 자비에 베이앙의 모빌 작품이 있는 리빙룸은 현실에서의 객관적 태도를 잠시 내려두고 환상의 세계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하고, 2층 전시실에 있는 필리핀 작가 레슬리 드 차베스의 작품을 베르나르 브네의 의자에 앉아서 감상할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만든다.
6 1층 윌리엄 켄트리지의 ‘Anti-Mercator’ 영상 작품과 작가 서도호의 ‘Gate-Small’ 설치 작품을 일본 건축가 사나의 ‘Flower’ 의자에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 7,8 톤 체어, 플렉스 체어, 비너스 체어, 네트 체어 등 검은색 의자들만 모아 복도에 길게 줄지어 전시했다. 공중에 떠 있는 설치 작품은 다카시 쿠리바야시의 ‘펭귄’이다. 9 필리핀의 역사적 상황을 현대미술로 풀어내는 작가 레슬리 드 차베스의 페인팅 작품 앞에 놓인 베르나르 브네의 의자가 마치 심판의 의자처럼 놓여 있다.
구정순 대표는 “미술은 의식주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은 관람객이기보다는 손님이죠. 제가 만든 커다란 집에서 다양한 창조적인 영감을 얻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전했다. 문턱이 높은 어려운 갤러리가 아니라 집처럼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자 한 의도는 건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 건축가로는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이 건축한 구 하우스는 흔히 볼 수 있는 재료인 벽돌로 마감했지만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무수한 픽실레이션이 보이는 변화하는 조형물로 완성됐다. 뮤지엄은 3205㎡의 큼직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만큼 이 뮤지엄은 본래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고 튀지 않는다. 주변으로는 초록 잎들이 울창해 인공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멋진 배경을 미술관 안팎에서 감상할 수 있다. “디자인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에요. 구 하우스는 제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보다 친근한 공간에서 디자인을 이해하고 자신의 공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요. 삶의 예술,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서 새로운 해답을 ‘집’에서 찾은 구정순 대표는 자신의 추억과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해 우리에게 새로운 감상의 기회를 열어줬다. 예술과 삶의 접점은 생각만큼 멀지 않다는 것. 그 친절한 대답을 ‘구 하우스’에서 만난 것 같다.
add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무내미길 49-12 tel 031-774-7460 web
10 다락방 컨셉트인 애틱에서는 레슬리 드 차베스의 그로테스크한 설치 작품 ‘The Specter’을, 포트레이트룸에서는 네덜란드 사진작가 에르빈 울라프의 사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1 마르크 베르티에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패밀리룸. 12 외부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아늑하게 만드는 커다란 프론트룸에는 조지 나카시마의 소파를 비롯해 조안나 바스콘셀로스의 설치 작품, 톰 딕슨의 파이론 체어, 프랭크 게리의 레드 비버 체어,토마스 헤더윅 디자인의 스펀 체어 프로토타입 등이 어우러져 있다.
13,14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작품처럼 보이는 공간. 장 프루베의 가구 컬렉션으로만 배치해 ‘장 프루베룸’이라 이름 지었다. 15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거울 작품 20여 점과 다채로운 장식 소품을 전시해놓은 공간에서는 구정순 대표의 소소한 취향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