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야깃거리가 있는 담백한 집을 만났다. 신세계푸드 외식 부문에 몸담고 있는 하주현 씨의 집이다.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집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조용히 책을 보거나 일을 하는 서재. 가장 좋아하는 하석 박원규 선생의 책을 펼쳐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본다. 가구는 대부분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것들.
성공한 사람의 집이라고 하면 으레 화려한 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진취적이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하주현 씨는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다. 그녀는 다니엘, 조엘 로부숑, 바 블뤼를 비롯한 세계적인 레스토랑을 거쳐 국내에서는 총지배인으로 라 카테고리를 이끈 파인 다이닝에 정통한 이력의 소유자다. 작년에 신세계푸드 외식 부문에 입사하면서 베키아앤누보, 데블스도어, 딘앤델루카, 루브리카, 패이아드를 총괄하는 하주현 씨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가열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런 그녀가 재충전하는 곳은 바로 집이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그녀에게 이 집은 추억의 집합소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모든 것에 이야기와 의미가 깃들어 있고, 2013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고 짊어지고 온 짐이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인 81㎡ 아파트를 고스란히 채웠다. “새것을 사는 것도 좋지만 버릴 이유가 없는 한 사용했던 것을 갖고 있는 편이에요. 짐스럽다기보다는 저의 과거이고 추억이고 무언가를 기억하게 해주는 매개체니까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그녀의 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짐이 별로 없다. 꼭 필요한 것만이 공간에 맞게 갖춰져 있을 뿐이다. “서재의 가구는 물론 침실의 침대를 빼고는 거의 미국에서 생활할 때 사용했던 것들이에요. 한국에 돌아오면서 새 가구를 살 수도 있었지만, 쓰던 것에 애착이 있어서 갖고 왔어요. 그릇도 그렇고 거실에 놓은 바르셀로나 체어는 한동안 둘 곳이 없어서 오빠 집에 맡겨두었다가 한국에 돌아오면서 다시 가져왔어요.” 집에서 업무를 볼 때 주로 머무르는 서재는 정적이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가구를 배치했고 좋아하는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하석 박원규 선생의 책을 펼쳐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본다.
1 간결하고 따뜻한 느낌의 거실. 패턴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마리메꼬의 그래픽 패턴은 마음에 들어서 쿠션으로 구입했다. 2 거실 반대편에는 오랫동안 사용해온 벽 거울과 조명을 두었다. 플로어 조명이 너무 오래돼서 플로스에서 구입한 조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3 방 하나를 다이닝룸으로 꾸몄고 베란다에는 아끼는 오래된 피아노를 두었다. 집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4 흰색을 좋아하는 하주현 씨가 모아온 정갈한 그릇들. 손님이 오면 그릇을 예쁘게 세팅해서 대접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5 요리책을 보고 있는 하주현 씨. 6 일본에서 구입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풍경.
그동안 사용해온 핸드폰과 근무지의 명함도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최근에 달라진 것은 식물을 구입한 정도예요. 지극히 평범한 집인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방 하나를 다이닝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식탁을 두기에 공간이 너무 좁아서요. 미국에서 올 때 이 집의 도면이나 모습을 보지 못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방 하나를 다이닝룸으로 만들었어요.” 부엌 바로 옆에 있는 방은 그렇게 다이닝룸이 됐다. 식탁과 국내에서 유행하기 전에 샀던 PH 조명, 의자만을 둔 이 공간은 혼자서 식사를 할 때도, 손님들이 와서 북적거릴 때도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포인트 공간이다. 다이닝룸과 맞닿아 있는 공간에는 피아노를 두었다. 하주현 씨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전문 피아니스트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어 종종 집에서도 피아노를 친다. “원래는 베란다 공간에 작은 가든을 만들고 싶었어요. 꽃도 심고 텃밭도 가꾸려고 했죠. 채소도 수확하고 마당을 보며 식사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베란다에 가든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꽤 큰 공사더라고요. 마음을 접고 대신 아끼는 피아노를 두었죠.” 비록 식물이 자라는 풍경은 볼 수 없지만 손때 묻은 피아노가 옆에 있는 다이닝룸은 그 자체로 충분히 근사했다. 외식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녀의 집 부엌은 상상보다 소박했다. 눈요기할 화려한 아이템보다는 그동안 모아온 그릇들이 내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원래 집도 하얗게 전부 칠하고 싶었어요. 하얗고 깨끗하게요. 그렇게 심플하고 비워진 듯한 느낌을 좋아해서인지 그릇도 대부분 흰색이고 투명한 것이 많아요. 여행 중에 사모은 빈티지 그릇만 컬러풀하네요.” 그녀만의 독특한 취향을 집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매사에 꼼꼼하고 완벽할 것 같다는 편견도 잠시, 틀에 박히지 않은 생활과 공간 활용이 흥미로웠다. 출근을 위한 화장대는 침실 AV장에 놓인 작은 거울로 대신하고, 가지고 있던 의자 두 개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 거실 베란다에 자리 잡은 벤자민 아래 쉼터처럼 두었다. 방 하나를 다이닝룸에 할애하면서 드레스룸을 꾸밀 공간이 마땅치 않아 옷은 모두 서재에 딸린 베란다 공간에 수납했다. 보통은 불편하다며 투덜거릴 법하지만 그녀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뭐 어때요. 집은 사는 사람이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면 그만이죠. 혼자 사는 데 별다른 불편함 없이 집에서 살림하고 요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요. 그런 시간이 제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요.” 파인 다이닝의 트렌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맛있다고 소문난 레스토랑은 꼭 가서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하주현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조건 한식이라고 대답했다. 달달한 디저트도 별로란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반전의 묘미를 지닌 그녀가 사는 집은 그래서 자꾸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었다.
7 그동안 사용해온 노트북과 휴대폰도 버리지 않고 정리해두었다. 한 켠에는 그녀가 근무했던 레스토랑의 명함도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8 침실에 둔 AV장은 단출하게 사는 그녀를 위한 작은 화장대이기도 하다. 9 하석 박원규 선생이 하주현 씨를 위해 선물한 작품. ‘옹’이라는 글자를 그만의 서체로 멋지게 표현했다. 10 벤자민 아래 두 개의 의자. 마치 나무 그늘 아래 쉼터처럼 걸터앉고 싶게 만드는 휴식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