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자의 삶이 중심이 된 집을 만났다. 이곳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공간의 본질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단독주택에서의 삶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집값은 물론이거니와 유지와 관리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도시 아파트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오랜 시간 아파트에서 살아온 신용욱, 이유미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현실적 문제로 아파트에서 살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우리 가족이 원하는 대로 공간을 고쳐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그저 하얀색인 순백의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설계를 맡은 아뜰리에페이퍼 한철수 소장은 이들 가족과 대화를 하면서 왜 순백의 공간을 원하는지, 왜 아파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지 고민했고,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의 평면이 다양하고 세분화된 요즘 가족의 삶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철수 소장은 주택을 짓듯 부부와 두 자녀 그리고 반려묘 행복이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비내력벽을 제거하며 공간을 재편성했다. 그 결과 거실, 침실, 서재 등 완결된 기능으로 정의된 룸의 이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거실은 ‘휴식과 단란함, 만남과 교류를 위한 곳’, 현관은 ‘도착의 안도와 시작의다짐을 위한 곳’, 베란다에 구성한 평상은 ‘앉거나 기대고, 대화하거나 사색하는 곳’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간의 주인공인 가족이 각 공간을 주체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집주인 이유미 씨는 “열쇠는 어디에 두는지, 공부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등 사소한 것부터 상담을 진행했어요. 마치 의사가 환자를 대하듯 저희 가족의 삶을 면밀히 진단하셨죠 .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동선이 구획된 것 같아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일상의 움직임에 거슬림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철수 소장은 공간을 이루는 요소에 디테일을 더하며 시각적 편안함도 유도했다. 맞춤 제작한 가구는 마치 벽처럼 존재했고, 걸레받이를 제거한 벽과 바닥의 이음새는 수직, 수평에 공을 들여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또 벽과 벽을 중첩해 시선을 이으며, 기존 아파트의 폐쇄적인 구조적 한계도 보완했다. 소재 선택에서도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재료 본연의 질감이 보이고, 만지지 않아도 손끝에 닿은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소재를 적극 활용했어요. 일반적인 재료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콘크리트는 가장 자연스러운 재료라고 볼 수 있어요. 거품, 텍스처가 매번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죠. 이곳은 벽지를 걷어내고 드러난 콘크리트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고, 흰색 페인트를 칠해 곳곳에 움푹 파인 자국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인 반려묘 행복이를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출입문 하단에 행복이를 위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이 자유롭게 했고, 거실 한 켠에 설치한 캣타워는 창문 틀과 이어져 행복이만 다닐 수 있는 길이 됐다.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공간에 식물을 들여 분담하고 키우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플랜테리어는 그라운드의 이지연 대표가 맡았다. “이지연 대표님이 공간을 직접 방문해 집의 방향과 바람이 들어오는 정도에 맞춰 식물을 추천해주셨어요. 거실에 놓인 남천, 아카시아, 페니로얄, 로즈마리는 남편이 맡아 키우고, 저는 오렌지 재스민을 키워요. 대표님이 주신 가이드라인에 맞춰 키우니 건강하게 자라요. 과거에 식물을 너무 거칠게 키웠던 것 같아 반성도 많이 했어요. 공간과 식물 모두 교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집주인 부부는 집을 설계하며 삶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순백의 공간을 원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였던 것 같아요. 화려하고 비싼 것을 소유해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고 좋아하는 것이 결국 큰 가치가 있었던 거죠.” 공간이 주는 풍족함을 느끼니 부부는 자연스럽게 덜어내는 삶을 지향하게 됐다. “마음에 드는 소파를 구입하려 했지만, 거실에 놓인 상상을 하니 가족이 아닌 소파가 주인공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거실을 비워뒀어요.” 이들은 예전과 달리 마루에 눕거나 평상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과거보다 현재의 방식이 편안하고 즐겁단다. “주말이면 밖으로 자주 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집에서 오롯이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을 하는 데도 만족감이 커요. 집에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아요.” 이 집은 수백 수천 개의 평면으로 복제되며 거주자의 삶을 배려하지 않은 아파트가 리노베이션을 거치며 가족만을 위한 맞춤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신선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