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인테리어가 여전히 강세인 요즘, 보기 드물게 과감한 색을 채택한 집을 만났다. 집주인 부부의 안목과 비하우스 김지영 대표의 감각으로 완성된 이 아파트는 다채로운 색 배합에 중점을 두면서도 사는 이의 취향과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컬러에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비비드한 원색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같은 색상 안에서 채도와 명도의 차이로 배색하는 톤온톤은 편안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한다. 비하우스 김지영 대표는 올해 초, 컬러 애호가인 클라이언트를 만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화이트 인테리어가 오히려 부담스럽고 주황, 노랑, 파랑 등 다채로운 색상을 좋아한다는 집주인의 의뢰를 받아 주거 인테리어에 과감한 색상을 적용했다. “보통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무난한 인테리어를 선호하죠. 그런데 컬러를 과감하게 쓰고 싶다는 클라이언트를 만난 거예요. 그런 흔치 않은 의뢰를 받으니 너무 신이 나서 ‘준비가 되었다면 마음껏 제안해드리겠다’고 했어요.” 김지영 대표가 의뢰인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말했다.
집주인 부부는 영국, 캐나다 등에서 생활하는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자주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몬트리올에 있는 프랑스풍 앤티크 호텔에서 봤던 컬러 조합 등 그간 스크랩해온 사진을 보며 공간의 이미지를 새롭게 잡아나갔 다.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60평대 아파트는 오래된 우드 톤 인테리어에서 벗어나 화사한 컬러를 입고 특별한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김지영 대표는 주 방을 가장 중시한다는 의뢰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집 안에서 포인트가 되는 곳으로 삼았다. 거실과 이어지는 주방은 개방감이 들도록 중문을 없앴고 복도 벽을 반쯤 허물어 집 안을 오가면서 주방을 볼 수 있게 했다. 주황, 노랑, 파랑 등 강렬한 원색이 사용된 주방은 마치 물감을 방금 짜놓은 팔레트처럼 눈이 부셨다. 어디서도 쉽게 접하지 못한 에너지가 이 장소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주방에는 3가지 컬러를 믹스할 계획이었는데 이왕 조합할 거면 대비감을 살려보고 싶었어요. 다채롭고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스페인의 이미지를 주고받으면서 컬러를 선별했고, 최종적으로는 빈티지, 레트로 느낌으로 결정했죠. 주황, 노랑과 대비되는 청록, 파랑을 리드미컬하게 배치했습니다. 서로 부딪히면서 생기 있는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요.” 김지영 대표가 설명했다. 그는 의뢰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떠다니는 이미지를 정리해 적재적소에 다양한 색상을 배치했다. 주방에 강렬한 색상을 적용했다면 거실과 방은 톤온톤으로 연출했다. 타일을 사용한 현관과 주 방을 제외하고 복도, 거실, 방은 검은색의 마루가 쭉 이어지는데 이 검은색 마루가 자칫 튀어 보이지 않도록 색 배합에 매우 신경 썼다. 흰색처럼 보이는 거실의 벽지는 실은 아이스 블루 색상이다. 검은색 바닥재와 흰색 벽지 를 배치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전반적으로 시원한 분위기가 감돈다.
안방에는 연한 카키색을 채택했다. 패브릭으로 마감한 침대 헤드보드 등 기존에 쓰던 가구와 어우러지도록 톤을 맞춰 블라인드와 엠보 패널을 적용했다. “톤온톤도 과감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예를 들면 검은색 마루 사이사이에 베이지색 라인이 보이는데, 이걸 연결시켜서 벽에 우드 톤의 엠보 패널을 사용한 거죠. 그 재질감에 맞춰 침대 옆에 우드 톤의 작은 다실을 만들었고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재료에는 한 가지 색만 있지 않아요.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컬러를 뽑아내서 배치하면 대비되는 색상이라 하더라도 공간이 어색하지 않고 서로 어우러지는 느낌을 낼 수 있습니다.” 김지영 대표가 배색에 대한 노하우를 귀띔했다. 컬러만큼 이 집에서 고려된 것은 질감이다. 요즘은 큼직한 무광 포세린 타일을 많이 사용하지만 김지영 대표는 컬러를 과감하게 쓰기로 하면서 작은 유광 타일과의 매치를 떠올렸다. 커다란 무광 타일은 단조로워 보일 것 같았고, 화사한 색감을 받쳐주려면 반짝이는 유광 타일이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논현동 일대를 샅샅이 다니며 마음에 드는 타일을 어렵게 찾았다. 그레이 타일은 현관 바닥에, 네이비 타일은 주방 바닥에 시공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현관과 주방 바닥은 빛이 들어올 때마다 물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듯한 효과가 났고 공간에 디테일을 한층 더해주었다.
이 집에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새로 인테리어를 하고 이사하면서 기존 가구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이다. 보통 분위기를 바꾸려면 그에 맞게 새 가구나 소품을 들이곤 하지만, 집주인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은 한번 사면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아끼는 편이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지영 대표도 그런 삶의 태도를 존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구가 곧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집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족이 편안하게 사는 공간이니까요. 그래서 의뢰인과 상담할 때 원하는 공간 컨셉트와 상관없이 애정이 가는 가구나 갖고 싶은 가구가 무엇인지 물어봐요. 그리고 그 가구가 최대한 빛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이야기하죠.” 그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말했다. 집주인 부부가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쓰던 가구와 소품은 이사 후에도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공간은 새롭게 달라졌지만 어딘가 아늑하게 느껴지는 건 사는 이와 세월을 공유해온 가구 때문일까. 좋아하는 색상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 이어나갈 삶의 여정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